La bonne heure
까암~짝 놀랐다.
나를 잡아 먹을 것만 같았던 그 여름의 햇살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프랑스의 해는 달랐다.
특히 남부도시 니스의 해는 너무도 달랐다.
이글이글 지글지글 그런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고 그 햇볕 아래 있으면 내가 해인지 니가 해인지 모를 타들어가는 느낌. 자외선을 온몸으로 쫙쫙 빨아들이고도 남을 것만 같은 따가운 햇볕이 우습다는 듯이 여름만 되면 해변은 구워지는 관광객들로 발딛을 틈이 없었다. 아마도 저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어서 였겠지. 그러나 정작 그 기막힌 풍경을 코 앞에 두고도 나는 맘 놓고 일광욕을 즐겨 본 적이 없다.
그건 나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나의 인생 컴플렉스.
그 강렬한 햇볕을 피해야만 했다.
어디를 가던지 미니가 급조해 준 썬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불어수업 들으러 갈 때도.
우리집 발코니에서 휴식을 취할 때에도.
심지어 빨래를 널 때도...
외출할 때는 두 말하면 잔소리지.
자외선이 너무 강하니 아무리 날이 예뻐도 눈이 부셔서 어쩔 수가 없기도 했다.
가만 보니 니스와즈들도 머리엔 항상 썬글라스를 얹고 다니기에 나도 그렇게 했다. 시커먼 안경은 그렇게 나와 한 몸이 되었다.
하... 다 소용 없었다.
이상과 현실은 매우 달랐고 그것들은 번성했다.
한국에선 찐득거려 기피하던 썬크림을 열심히도 발라댔고, 귀찮고 답답하던 검은 썬글라스도 한 몸처럼 쓰고 다녔건만 아...
현실은 왜 이리 잔인한가.
나의 감추고 싶던 비밀들은 황금기를 맞이했고 이것은 흡사 10대의 어느 날, 나의 암흑기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 고백할 때가 되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아셨겠지만 나의 인생 컴플렉스는 바로 주근깨다.
뭐 그런게 컴플렉스냐고 하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만 이건 안가져본 사람은 모른다. 점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외선에 노출될수록 더 많아지고 더더 짙어지기도 하는 마구 변하는 무서운 놈이다.
십대가 되고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인지 아니면 그 무렵 주근깨가 눈에 띄기 시작해서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던건 확실하다. 이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한 건... 왜냐하면 내가 아니라 사람들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컴플렉스가 될 요소라는걸 몸소들 일깨워 주셨다.
입장봐꿔 생각해 보라. 친구들이 놀리는건 둘째 치고 생판 남인 누군가가 아직 어린 십대소녀에게 "어린애가 벌써 기미가 있네."라는 소리를 하면 그 소녀의 기분이 어쩔지...
고1때 우리 반엔 나와 또 다른 한 명의 친구. 딱 둘만 주근깨가 있었는데 우린 교실 한쪽에서 종종 주근깨 가진자의 스트레스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건너건너 들은 얘기론 그녀는 주근깨 레이저 시술을 받고는 절세미인이 되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 친구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고 나는 주근깨 동지로서 그녀의 변신이 진심으로 기뻤다.
내 흑역사의 한 켠엔 엄청난 숱에 굵고 반곱슬인 나의 머리카락도 있다. 두발제한이 있던 시대에 나에게 가능한 헤어스타일은 오직 단발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처럼 차분하게 정돈되고 찰랑거리는 머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랬던 나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 본적 없고 앞으로도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스타일은 물결펌을 한 삼각김밥머리!
아~ 너무 싫다.
인생에 음지만 있으란 법도 없지.
대학생이 되고나서 조금씩 한을 풀기 시작했다.
염색하고, 펌도 하고, 길러도 보고, 잘라도 보고, 탈색도 해봤고 하고 싶은건 다 해 봤다. 그리고 문제의 주근깨도 화장을 하니 눈에 좀 덜 띄는거 같았는데...
오산이었다.
여러 학과 학생들 100명 정도가 같이 듣는 교양수업. 원어민 교수님의 시간이었는데 글쎄 이 분이 그 100여명 앞에서 내 주근깨의 존재를 대대적으로 알리신거다. 주근깨 있는 이 아이가 참 귀엽구나 라는 긍정적 뉘앙스인건 알겠으나 왜 그걸 그렇게 모두에게 크게 말씀하시는거냐고요... 그 날 이후 교수님은 나를 보시는 족족 "주근깨소녀 머리 잘랐네!"식의 멘트를 상냥하게 수시로 던져 주셨는데 교수님의 그 순수한 칭찬 이후로 학과사람들에게서 "그 기미 어쩔래?"라는 질문과 놀림을 알마나 받았는지 교수님은 상상도 못하시겠지.
졸업하고 승무원이 되고 나서 레이저를 빵빵 쏴 주었다. 드디어 백옥은 아니더라도 화장으론 가려지는 베이비 레벨이 되었다. 이 기쁨은 주근깨 동지가 아니라면 모를 것이다. 다행히도 그 후로는 딱히 신경쓰지 않아도 관리가 잘 되었는데 니스의 그 햇볕이, 프랑스의 해가 나를 다시 그 시절 암울한 깨순이로 돌려 놓고 말았다.
게다가 석회로 가득한 수돗물 덕에 내 머리카락은 엉키고 설키고 수세미가 형님하자고 하게 생겼다.
그렇다. 나는 다시 못생겨지고 있었다.
3년 전 봄, 한국에 가는 표를 사자마자 피부과를 검색했다. 그리고 한국 들어가자마자 방문할 수 있게 예약도 했다. 데이트하면서부터 결혼하고 같이 사는 지금까지 내 주근깨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던 미니는 내가 피부과에 가야겠다고 하니 이해를 못하고 펄쩍 뛰었지만 난 갔다.
미니 몰래~
그리고 퇴짜 맞았다.
세상에! 피부과 쌤이 나를 퇴짜 놓으셨다!
마침 스페인 휴가에서 돌아오셨다며 그을린 본인의 팔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상담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한국은 현재 패션과 미용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외모에 대한 집착이 과한 측면이 있다. 유럽은 햇볕 자체가 다르고 생활 방식이 다르지 않나. 지하도가 많고 실내생활이 주가 되는 한국과 다르니 관리가 굉장히 어려울거다. 시술해도 6개월 안에 주근깨 다 나온다. 그러니 미에 대한 기준을 유럽마인드로 바꾸고 살고 언젠가 한국에 정착하게 되면 다시 오라....
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물으셨다.
프랑스에선 아무도 주근깨 얘기 안하죠?
아... 할 말 없다.
30분간의 상담이 그렇게 끝.
나의 레이저에 대한 간절함도 그렇게 끝.
파리에 사니 가끔은 니스의 그것이 그립다.
그 햇살이 이토록 그리워 질 줄은 정말 몰랐다.
맑은 말보다 흐린날이 많은 이 곳의 기후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거부한 피부과 쌤 때문일까?
것도 아니면 내 마음이 달라진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햇빛이 보이면 콧구멍이 커지고 심장이 발랑거린다.
뛰쳐나가지 안고는 못배긴다.
어디든 일단 나가야한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카페에 앉아 있어도 좋고.
똥색 세느강을 바라보고 있어도 좋다.
내 얼굴에 내리쬐는 그 볕이 있는 한 어디든 천국이다.
따뜻하다.
햇살이 좋던 지난 주말에 내 친구 쏘를 만났다.
"브런치에 내 주근깨 얘길 쓸까해." 라고 화두를 던지면서 프랑스에 온 뒤로 우리의 외모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꾸며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했었는지, 다양성을 존중받는 이 곳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생각 등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친구는 말했다.
그녀는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내면이 자유롭고 당당하면 된거 아니냐 라는 교과서 같은 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시선은 마침 카페에 들어온 한 여인에게 향했다.
"야, 너 자유롭다며?!"
"... 난 이래서 프랑스가 좋다니까."
우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아직도 멀은건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린 변했다.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쏘의 얼굴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고, 그 말을 듣는 내 마음 역시 동요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 넘어로 햇빛이 눈부시다. 주근깨는 여전하지만 어젯밤엔 마스크팩도 했고, 머리가 좀 엉켰으나 깨끗하게 감았으니 샴푸향기가 은은하다. 안경쓰고 민낯으로 외출해도 당당하다.
내 얼굴인데 뭐~
나 아니면 누가 이렇게 사랑해줄까?
해 떴다.
뛰쳐나가지 않고는 못배긴다.
남편! 나 좀 나갔다 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