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u Bazzano
지난 번에 몇 차례 소개했던 마누 바자노의 글을 번역해 올린다.
저자는 기존 심리 치료계의 주류적 태도, 혹은 유행을 선도하는 접근법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우리들에게 익숙한 켄 윌버, 조던 피터슨, 가보 마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신랄하다. 이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나의 마누 바자노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어서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통해서 말하겠다.
초벌 번역이고 심리 치료 용어가 낯설어서 오역이 있을 수 있으니, 용서해주길. 추후 수정하겠다
주말에 한 편씩 글을 올리겠다는 내 나름의 원칙을 세웠으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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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독하는 여러 심리학 잡지 중 하나가 들어 있는 봉투를 열 때마다 트라우마, 애도grief, 상실loss에 관한 전단지가 쏟아져 나온다. 트라우마, 애도, 상실에 관한 회의와 세미나 광고가 잡지와 저널의 대부분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트라우마, 애도, 상실에 관한 기사와 최신 트라우마, 애도, 상실에 관한 전문가와의 정기 인터뷰를 위한 공간이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교육생과 동료들은 나에게 지난번 참석했던 트라우마, 애도, 상실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 대해, zesty zoom webinars 화면을 통해 그동안에 밝혀진 선구적인 연구 결과에 대해 수시로 이야기한다. 다발성 이론부터 신경생물학, 외상 후 '성장growth'에 이르기까지 최신의 흥미진진한 주류 흐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아닌 당근과 같은 것들을 위한 개념이며 신경과학은 아직 요람에 불과하고 그 주장이 너무 과열된 것 같다는 나의 회의적인 반론은 기꺼이 무시해 버린다. 그들은 이 스마트한 새로운 통합적 설계integrated schemes가 트라우마, 애도, 상실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에는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이 어려웠다고, 밝은 색상의 전단지는 인정하지만, 다행히도 최고의 양식들을 모아 “통합”(이러한 내러티브의 핵심 단어)하는 성공적인 순열이 방금 고안되었다. 이 화려한 광고의 가장자리에서 완전히 통합된 외모를 가진 전설적인 임상의가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새로 만든 이 모델을 자신 있게 '관리curate'할 것이라고 잠재 고객들은 말한다. '큐레이트curate'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떠올리게 하는 적절한 단어이다. 즉, 트라우마가 없고 정식으로 약물이 투여된 제품을 일상적으로 밀어붙이는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큐레이팅'과 옛날의 답답한 방식(“차 더 주세요, 목사님?”)말이다.
국보급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자연'을 묘사한 그의 작품은 현대 신경심리학에서 그토록 사랑받는 푸르고 쾌적한 조절된 정서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호크니의 복고풍과 원색적인 색채의 조합은 현대 영국 중산 계층의 권태로운 꿈을 담아내는 세련된 도구를 제공한다. 그의 예쁜 그림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같은 훨씬 더 중요한 예술가들의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지만 장엄한 분노로부터 문화 애호주의culture vultures와 문화 속물주의 모두를 면역시키는 데 적합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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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삶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트라우마는 자유 시장, 개인의 자유, '건강한' 경쟁에 대한 환상이 우리 모두를 운명의 상처와 고뇌와 불확실성이라는 실존적 불만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히기 쉬운,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고유한 것이다. 게다가 트라우마는 종종 가족 내에서 부화되고 복합화된 상처의 결과이며,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에 의해 이상화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토대이자 이론적 지향에 걸쳐 현재 그 아바타들은 모두 본질주의와 생물학주의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모든 주방에서 조용히 또는 조용하지 않게 내려가 천천히 타들어가는 미시 파시즘microfascism을 지지한다.
내가 아는 모든 치료 교육은 데이터주의, 즉 세상을 맥락이 제거된 데이터와 측정 가능한 합리화로 축소할 수 있다는 파워포인트 중심PowerPoint-driven의 믿음에 포위되어 있다. 이는 (공감의 척도로 공감을 측정한다는 개념처럼) 터무니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리콘 칩의 합성 날개로 정치를 대체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할 전능한 기술의 힘에 대한 어리석고 사이비 진보적인 헌신이라는 일종의 해동된 블레어주의자의 헛소리Blairite baloney와도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한다.
요컨대, 반동 세력reactive forces 이 심리학의 세계를 장악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질문은 순진한 질문이다. 기업화된 마음챙김Corporate Mindfulness, Burning Man, 실존치료, 사이보그 중심 치료Cyborg-centred Therapy 등이 등장하기 전에 한때는 변혁적 심리 탐구의 불모지가 있었다고 가정한다. 전복적이고 탐구적인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심리학계는 처음부터 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성 심리학자들의 궤적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Bly, Hillman, Meade 등의 풍부한 양면성을 지닌 신화적-서사시적 작업에서부터- katabasis(몰락descent, 하강going under), 고정관념에 대한 의문, 마음의 남성성을 되찾는 것을 통하여– 현재 조던 피터슨이 옹호하는 성별에 대한 구시대적이고 반동적인 생각에 대한 편협한 본질주의적 방어에 이르기까지 여행해왔다.
두 경향성 모두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몸서리가 쳐지지만) 핵심적인 영감은 융으로부터 온다. 융의 가장 수준 이하의 제자였던 피터슨의 진부한 자조적 용어로 광고되는 이 유명한 스위스 의사의 작업의 핵심에는 대문자 “S”로 시작하는 자아Self의 미화, 플라톤주의에 대한 의존,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한 공포, 다양성에 대한 유혹과 궁극적인 거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동적 정치와 같은 측면이 있다.
그들보다 앞서 켄 윌버의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터슨주의자들은 대부분 유튜브 동영상을 즐겨 보며 정체성, 가정 소유권, '진리'에 대한 공격적인 옹호라는 이름으로 '마르크스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위험성에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종종 그들을 이끄는 것은 이질적인 것, 이분법적이지 않은 것, 성적 및 관계적으로 양가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남성 단체의 상당 부분이 극우 및 혐오스러운 남성 혐오 세력과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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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대사회의 풍경들] 출퇴근의 정글, 유동적 세계,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경주장rat-race fields, 재택 근무, 넷플릭스 세계 Netflixand의 포르노 중독 프레카리아트precariat .
그들 사이에서 트라우마는 철저히 거짓 욕구에 대한 거짓 희망으로 다양한 형태를 제공하며, 그 중 마지막은 방대한 소수 전문가 명단과 다양한 기술, 전 세계의 당황한 상담사를 위한 기성의, 단조로운 세계관을 갖춘 광대한 수익성이 높으며 다각도로 접근하는 일종의 산업이다. 상담사들은 [공산주의자] 레닌의 관점을 기괴하게 뒤집어, 이 한심한 환상, 피곤하고 삼류이지만 잘 덧칠해진 신자유주의적 헛소리, 즉 철저히 기능 장애가 있는 세상에서 '완전한 기능'을 하겠다는 서약을 사회에 주입하는 음산한 임무를 맡은 반응적 전달 벨트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지치고, 가난하고, 숨을 쉬고 싶지 않아 웅크리고 있는 대중을 나에게 보내달라. 그들을 온라인 트라우마 과정에 보내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치료의 여신상Statue of Therapy 이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미국 헐리우드 스파게티 서부극에 나오는 현상금 사냥꾼처럼 신체가 점수를 유지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신체가 영지주의적 진리와 궁극적으로 진실한 신체 감각 Ultimately True Felt Sense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폭풍우에 던져진 나에게 치료의 조각상을 보내면 자율 신경계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통제된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에 웃으며 성실하게 적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들은 교통 체증 속에서도 소중한 자리로 행복하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다시 빠른 고속도로로 돌아가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정신세계가 혼수상태에 빠져 순응적인 상태로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은 트라우마 치료사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심리학과 심리치료가 어떤 힘에 봉사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내 생각에는 능동적인 힘보다는 반동적인 힘에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이 정식으로 병리화되어 박물관으로 강등된 심리 치료 기업 전체가 이제 반동적 힘의 침대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적이지만, 위험한 광대와 인종차별주의 폭군이 지배하는 '트라우마적' 환경에서 진보 정치의 특징은 욕망, 야망, 인간성이 아닌 트라우마만으로 전체 공동체를 분류하는 상처의 정치학 politics of injury 외에는 비전 없는 명백히 방어적인 입장이다.
조 바이든은 상처의 정치학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로, 첫 번째 부인인 Neilia와 딸 Naomi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나중에 아들 Beau가 사망하는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과 같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사망한 케네디 가문과 강하게 동일시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편견과 인종 차별, 공화당에 의해 성역화된 악의 집단이라는 멍에를 쓴 나라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세운 이민자에 대한 차별 정책을 유지해왔고, 미국의 이민 통제를 멕시코와 중미 보안군에 아웃소싱했다. 그는 사우디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처하겠다는 선거 전 성명을 따르지 않았고, 미국이 소위 자유 세계의 지도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이란 핵 협상을 되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목록은 계속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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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치 영역과 정신의 사적인 영역 모두에서 경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의 반란은 상상력에 대한 모든 권력과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과열된 지구에서 살아남고 고독하고 무해한 '자유'라는 개념을 조용히 즐길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심리치료의 세계에서도 변화와 해방, 타인과의 연대 속에서 보다 온전히 살아가려는 열망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문적 지식뿐이다. 상처의 정치는 상처의 심리치료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바이든이 전자의 대표라면, 가보 마테는 후자의 구루이다. 그의 신경 환원주의neuroreductionism는 현재 대세이며, 대리 트라우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치료사들의 귀에 감미로운 음악과 같은 일련의 설명을 제공한다. 확실히 가보 마테는 밴쿠버의 도심의 중독자들과 함께 일한 중독 분야의 명쾌하고 인간적인 실무적인 치료사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약 15년 전 내가 그곳에 있었을 때, 마약 중독자와 노숙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게토화된 지역에 실수로 발을 들여놓은 방문객에게는 단테의 지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보 마테가 일하던 The Insite Injection Centre와 Portland Hotel 은 주거와 심리적 지원의 형태로 귀중한 도움을 제공했다.
“당신의 고통을 느낍니다I feel your pain"라는 빌 클린턴의 명언은 마테의 접근 방식을 요약하는 말일 수 있다. 확실히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대한다. 또한 대부분의 치료적 세계가 그러하듯 두 사람 사이에 평등한 지점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가정하거나 어네스토 스피넬리 Ernesto Spinelli처럼 관계성에 대한 믿음과 하버마스처럼 시민적 대화를 통해 이러한 지점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엄청난 비율의 비대칭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마테는 비록 당신이 무일푼에 노숙자이고 헤로인에 매달려 있는 반면에, 나는 자신처럼 ADHD와 쇼핑 중독에 '시달리는' 부유한 치료사라고 해도 당신과 나는 다르지 않다고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중독이 다 똑같다는 점에서 여러분과 나도 똑같지 않은가? 그것들은 사실상 뇌 기능 장애의 한 형태이며, 그 뿌리는 어린 시절에 겪은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애착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의 불충분한 처리를 초래하는 학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타 등등. 이 모델에 따르면 약물이나 다른 형태의 중독이 누락된 자극을 대체한다.
이 접근법이 왜 환원적일까?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초기 남용과 추측되는 생화학적 변화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된 이유이자 원인이 된다. 생물의학 모델이 이토록 설득력 있는 옹호자를 얻은 적은 없었다.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맥락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우회된 적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중독자라는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마테와 같은 자비로운 전문가의 안내에 따라 우리 고통의 트라우마적 근본 원인을 찾도록 안내받을 수 있는 안전한 마을에 내릴 수 있는 행운뿐이다(필연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러면 우리는 치유될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통합'되고, 교통체증 속에서 소중한 자리를 되찾으면 혁명에 대한 열망은 모두 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