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고심 끝에 박사 과정에 진학했던 해,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해도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권유대로 '잠깐만' 쉬었다가 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도 나를 격려해 주었다.
첫 학기를 일단 시작해 놓았으니
수월하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철떡 같이 믿고 즐거이 당당하게 결혼을 했다.
혹시라도 결혼을 하게 될까 봐 모아 놓은 돈은
단 500만 원이었다.
남편도 뭐 별 거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소박하고 짠내 나게 예식을 치르고
집도 혼수도 최소한으로 준비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학력 저소득의 순진한 부부는
그 와중에도 공부방에 대한 로망만큼은 열렬히 꽃 피웠다. 남편은 트럭을 빌려 가구도 들여놓지 않은 좁은 집구석에 책부터 잔뜩 쌓았으며, 나는 그 좁은 집에 굳이 커다란 책장과 책상을 또 들여놓았다. 그것도 남녀평등사상에 의거하여 특히나 아내에 대한 존중을 실현하기 위해 똑같이 두 개씩을 마련했다. 장롱도 어차피 들이지 않았으니, 우리의 신혼집은 침대 하나가 빠듯하게 들어가는 작은 방 하나와 공부방이 전부였다. 미닫이 문을 뜯어낸 거실 겸용의 큰 방 하나를 기어코 부부의 서재로 만들어 놓고, 천장 높이의 대형 책장 두 개를 세운 후 각자의 책을 전시하듯 꽂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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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책상이라는 나의 로망은
이렇게 실. 현. 되었다.
우린 각자의 자리에 앉아 공부했고 대화했고 커피를 마셨다. 내가 원하던 대로 말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삶은 바뀌었다.
스물스물 책장 하나가 줄었다. 책을 뺀 책장을 가로로 엎어 아이 물건의 진열장으로 사용했다.
남은 책장 하나도 스물스물 어느샌가 작은 사이즈로 바뀌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에는 책상이 하나 줄었다.
남은 책상 하나도 스물스물 어느샌가 작은 사이즈로 바뀌었다.
결국 지금의 우리 부부는 작은 책상 하나를 구석진 곳에 놓아두고 '공유'하며 산다.
나는 공부는커녕 일도 이어가지 못했다.
첫째를 낳기 일주일 전까지 만삭의 몸을 절뚝거리며 일했노라는 자부심만
전설처럼 홀로 간직하고 있다.
일을 포기하기까지 걸린 시간,
일을 포기했다고 말하기까지 걸린 시간,
공부를 포기하기까지 걸린 시간,
공부를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걸린 시간.
5년을 앓고 나서야 나는 좀 가벼워졌다.
일을 그만두고 나니 일이 아닌 삶이 보이고
공부를 포기하고 나니 진짜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보이기는 한다. 명예도 돈도 되지 않는 공부들을 생산성 논하지 않은 채 파고들고 싶다는 욕망도 처음 경험해 보았다. 의미와 목적에 대한 추궁에서 자유해지는 경험은 내가 '전업주부'여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우리의 신혼 서재를, 부부의 책상을 복원하겠다는 로망을 버리지 못한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아니 아이들이 독립해 나가면...으로 끊임없이 유보되는 꿈이지만 말이다.
'전업주부'가 될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었다면
잠깐의 신혼을 위해 두 개의 대형 책상을 들이지는 않았겠지만,
내 신혼 생활의 가장 진한 추억으로 자리잡아 주는 역할 만큼은 톡톡히 해 내었으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