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혼은 했지만 아내의 빚을 책임진 걸로 알고 있다. 그의 이혼은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나 역시 그를 욕하기보다 이해했었다.
그래 세상은 더 이상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몫에 대해모두가 어느 정도는 야무지며 많은 이들이 예민하고 민감하다.
91세 할머니가 아들 며느리로부터 생애 첫 독립을 하셨다. 말이 독립이지, 분가인지 고려장인지 뭔가 애매하고 찜찜한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 시어머니를 모신엄마에게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엄마도 68세다. 정정한 할머니와 달리 엄마의 깜빡 깜빡이 심하게 잦아지고 시어머니에 대한 스트레스도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딸인 내게 하소연을 할 적마다, 그 감정의 찌꺼기들을 받아내야 하는 나도 지쳤다. 내 새끼 둘 보는 일도 힘이 달려 극심한 육아 스트레스에 나 또한 시달리고 있었다. 여력이 없을 땐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가난한 '장수'는 결코 복이 아닌 것 같아.
할머니의 인생을 알고 할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해 줄 분들은 이미 먼저 하나 둘 떠나버리셨다. 너무 오래 살았기에 아들의 암 판정 소식까지 들어야 했던 할머니의 인생이 복인가 싶다, 난.
그럼에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인 것을 안다.
할머니 또한 며느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더 사실지 알 수 없지만
하루를 더 살더라도 한 달을 더 살더라도
할머니 또한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랐기에 나는 양쪽에 대고 피차분가를 부추겼다.
금쪽같은 내 새끼도
하루 종일 끼고 있으면 열불이 난다.
우리는 함께 그러나 또 따로가 필요한 존재들이거늘,
두 사람은 너무 오래 함께이기만 했다.
따로의 시간을 누리며
각자 그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해?!
희생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가정은 사회는 공동체는 없다. 그러나 희생만 존재하는 곳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