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09. 2021

잔치 느낌 물씬, 구절판

명절에 이거 하나면 다른 음식에 젓가락도 안 가는 아이템

구절판은 내 머릿속에서 지정한 가장 럭셔리한 잔치 음식이다. 보기에도 화려하고, 맛도 화려하다. 처음에 아버지 술안주로 어머니가 만드셨는데, 정말 특별 이벤트였고, 우리는 모두 숨죽여 이 구절판을 먹으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가끔 명절에 이 구절판이 등장했었는데,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만족도는 늘 최상이었다. 명절에는 늘 맛있는 음식들로 상이 가득 차지만, 이 구절판만 등장하면 다른 것들은 다 찬밥이었다. 옆에 있는 갈비도 뒷전이 되게 만드는 이 신비로운 음식은, 그래서 지금도 정말 특별 이벤트로 만들게 된다. 


여기 캐나다에 와서 두 번째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한국의 궁중 음식을 남편에게 소개하느라 한 번 했었고, 그러고 통 안 하다가 이번에, 딸도 와 있으니 명절 음식으로 다시 손을 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구절판만 그렇게 손이 많이 간다고 할 수도 없다. 한국 음식은 사실 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가? 남편이 신기해하며 묻는 말 중 하나가, "어차피 다 섞을 것인데, 왜 다 따로따로 볶아?" 바로 이거다. 주말 점심이 마땅치 않아서 먹다 남은 스테이크와 찬밥으로 비빔밥 했는데, 함께 넣을 나물이 마땅치 않아서 휘리릭 숙주나물과 시금치나물, 무나물, 팽이버섯 볶음을 해서 얹었더니, 바로 저 질문이 나온 것이다. 비빔밥은 어차피 다 넣고 마구 섞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 한국 음식은 뭘 해도 이렇게 다 따로따로 볶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일 유난스러운 것이 잡채이다. 다 따로따로 생생하게 볶은 다음에, 삶은 당면과 무참하게 섞어 버린다. 그래서 잡채는 한동안 내가 참 하기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죽어라 고생하고, 결과물은 달랑 한 접시. 손 몇 번 가다가 말게 되는 아쉬운 음식이라는 생각을 떨구기 힘들었다. 


그에 비해 구절판은, 바로 이 고생한 보람이 있는 음식에 해당된다. 사실 주부 경력 몇 년 넘어가면, 이 정도 따로 볶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구절판에는 또 하나의 복병이 있기는 하다. 바로 밀전병이다. 구절판의 한가운데에 동그랗게 앉아있는 이 밀전병을 하나하나 부치는 일은 또 하나의 손이 가는 일에 해당된다. 



때론 사람들이 귀찮은 밀전병 대신 무를 얇게 썰어서 대신한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절대 그렇게는 못 한다. 그것은 구절판이 아닌 뭔가 다른 음식이다. 여름철 시원한 별미로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잔치 음식으로써의 그 느끼함은 절대 가질 수 없다.


이 구절판은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도, 명절 때 친정식구들이 모이면 과거를 회상하며 만들어먹곤 했는데, 그때마다 밀전병 부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손이 일정하게 움직여서 똑같은 크기로 차분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사실 손이 느린 내겐 딱 맞는 일감이었다. 내 동생은 칼질에 능하기 때문에 착착 썰어 내는 일이 담당이었고, 어머니가 옆에서 재료들을 따로 볶는 일을 하셨다. 여자 셋이 함께 한다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그렇게 해서 상 위에 구절판이 올라가면, 우리는 모두 앞접시를 놓고, 바삐 손을 놀려가며 먹느라 분주했다. 그것은 또한 아이들에게도 기쁨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딸도 명절 최고의 음식으로 단연 구절판을 꼽는다. 




잡채 정도는 만들 수 있는 분들이라면, 조금만 더 공을 들여서 근사한 궁중요리인 구절판을 만들어보자. 비슷한 공으로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구절판은 가운데 밀전병을 제외하면 8가지의 재료가 들어가는데, 대부분 채를 썰어서 모양과 크기를 맞춘다. 채의 길이는 대략 5cm 정도면 된다. 그렇다고 자로 재가면서 할 필요는 없다! 오이는 어슷 썰기를 한 이후에 채를 썰면 양 끝에 초록색 부분이 들어가서 보기에 좋다. 당근도 같은 방식으로 썰면 모양이 같아서 좋다. 단, 오이는 소금을 뿌려뒀다가 물기 없게 꼭 짜준다. 양파는 반 자른 후에, 최대한 가늘게 채를 썰어준다. 달걀은 황백을 갈라 소금 조금 넣고 지단을 부쳐 채를 썬다. 고기는 홍두깨나 양지 같은 잡채용 소고기를 이용해서 가늘게 채 썰고, 파, 마늘, 간장, 참기름, 깨를 넣고 갖은양념을 해둔다. 표고버섯은 불려서 가늘게 채 썬다. 



그리고 석이버섯이 들어가는데, 여기 캐나다에서는 구하지를 못해서 결국 목이버섯으로 대신했다. 돌에서 자란다 하여 석이버섯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목이버섯은 약간 밤색이 돌지만 석이버섯은 완전 검은색이다. 뜨거운 물로 불리고, 소금으로 문질러 이끼 없이 손질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목이버섯을 불려서 채를 썰었다.


볶는 것은 하나의 프라이팬으로 차례차례 하는데, 색이 연한 것부터 진한 순서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우선 달걀흰자와 노른자의 지단을 차례로 부친다. 그다음에 양파, 오이, 당근의 순서로 소금 뿌려가면서 빠르게 볶아준다. 너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볶을 필요 없이, 날 것 같은 기운이 빠질 정도로만 볶는다. 색이 살아있게 볶아야 예쁘다. 


그다음에 고기를 먼저 볶아내고, 그 남은 육수에 표고를 넣어서 볶아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이버섯을 볶아주면, 볶는 순서가 마무리된다.


저 뒤에 추가 접시도 함께 채워지고 있다


볶는 대로 큰 접시에 빙 둘러가며 담아준다. 구절판 전용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냥 접시에도 충분히 세팅할 수 있다. 다만 일반 저녁식사용 보다 큰 과일 접시 정도의 크기를 사용해서 넉넉히 돌려준다. 담을 때에도 색상을 생각해서 담는다. 이를테면, 달걀흰자와 양파가 나란히 담긴다거나, 고기와 표고버섯이 나란히 가면,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니 그 점을 생각하면서 담으면 좋다. 접시 하나에 충분하지 않다면, 다른 접시를 하나 더 해서 두 군데로 준비하면, 나중에 남은 것으로 한 번 더 잔치 기분을 낼 수 있다. 


시간이 모자라겠다 싶으면, 볶는 과정은 전날 해두고, 밀전병만 당일에 부쳐도 된다. 밀전병은 밀가루와 물을 1:1 비율로 해주고, 소금 간을 살짝 해준 후, 체에 반드시 한 번 내려준다. 체에 내리는 것은 필수이다. 농도는 약간 묽다 싶은 기분이 들어야 맞다. 나는 밀가루 대신에 글루텐프리 베이킹 가루(Bob's Red Mill 1:1 baking flour)를 사용했는데, 손색이 전혀 없었다. 


밀전병을 부치는 데에는 약간의 요령이 필요한데, 프라이팬은 잘 달궈서 들러붙지 않게 준비해주고, 기름은 적당히 둘러주는 것이 좋다. 기름이 너무 많으면 예쁘게 안 되고, 그렇다고 기름이 너무 적으면 맛이 없다. 기름이 살짝 지나간 곳 위에 동그라미를 만들어주고, 뒤집을 때에 일부러 약간 기름이 있는 쪽에다가 엎어주면 좋다. 일반 밥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뜨면 딱 적당한 양이 된다. 


이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짧게 영상을 찍어뒀다. 나는 유튜버가 아니라 그리 멋진 영상은 만들지 못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영상을 보니, 명절 지나고 다시 해 먹을 때 찍어서, 베이킹 가루가 똑 떨어져, 집에 있는 다른 가루를 사용했더니 색이 좀 다르다. 하지만 부치는 방법은 같다.



모양은 숟가락으로 억지로라도 잡으면서 최대한 얇게 부쳐야 한다. 얇게 잘 안 되면, 물을 한 수저 더 넣어 농도를 맞춰준다. 너무 서두를 필요도 없고, 적당히 모양 잡아가면서 부치면 어렵지 않다. 이렇게 완성되고 나면 작은 접시에 차곡차곡 쌓아서 모았다가, 한 김 식은 후에 구절판 접시에 올린다. 이렇게 전병까지 올라앉고 나면 딱 9가지가 다 마련된다. 



작은 종지에 간장과 식초, 후추를 뿌린 초간장을 놓고, 꼬마 차 스푼을 놓는다. 꼭 1인당 1개일 필요는 없고, 두 세 사람이 하나의 종지를 공유하면 된다.



그리고 앞접시는 필수이다. 모든 재료를 아주 조금씩만 집어서 밀전병 위에 쌓고, 간장을 살짝 얹어준 후,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집어 들어 한 입에 쏙 넣는다. 그러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러 가지 음식의 맛이 입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섞여 들어간다.



그러면 그 순간, 다른 모든 반찬들은 다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나물이나 김치뿐만 아니라, 갈비나 녹두전도 말이다. 이번 명절은 가족모임이 금지되었던데, 정식 차례상을 크게 차리지 않는다면, 이런 별식으로 식구들끼리 오붓하고 재미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구절판

5인분


재료 : 

달걀 4개

양파 1개

오이 1개

당근 1개

표고버섯 8장

석이버섯 한 줌, 

소고기 잡채 거리 200g

밀가루 2컵 (글루텐프리 가루로 대체 가능)

물 2컵

소금 조금

초간장



만들기 :

1. 석이버섯 : 뜨거운 물에 불려 소금으로 문질러 이끼 없게 손질한 후 돌돌 말아 채 썬다.


2. 표고버섯 : 역시 물에 불려, 얇게 채 썬다.


3. 소고기 : 가늘게 채 썰어 갖은 양념 해둔다.


4. 오이 : 어슷썰기 후 채 썰어, 소금에 조금 절여 물기 없이 짠다.


5. 당근 : 어슷썰기 후 채 썬다. 


6. 양파 : 반으로 자른 후, 길이 방향으로 최대한 가늘게 채 썬다.


7. 계란 : 4~5개 정도 준비하여 흰자 노른자 갈라 각각 소금 조금씩 넣어준다.


8. 모든 재료를 따로따로 볶는다. 순서도 반드시 지킨다.

   야채를 과하게 볶지 말고, 살짝 숨이 죽을 정도로만 볶는다. 색이 변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먼저, 달걀을 소금 조금씩 넣어 각각 지단을 부쳐, 꺼내 채 썬다.

   양파, 소금 살짝 뿌려 볶는다. 

   오이, 꼭 짜서 볶고

   당근도 소금 살짝 뿌려 볶고

   소고기 볶고 꺼낸 양념을 활용하여, 표고버섯, 석이버섯 순으로 볶는다.

   따로 볶으면서 순서를 두는 이유는 프라이팬에 색이 배기 때문임.


9. 볶는 재료가 다 준비되었으면, 한 김 식힌 후 마르지 않게 덮어두고 전병을 준비한다. 

   모두 당일 준비가 좋겠지만, 정 여의치 않으면, 볶음은 미리 해서 냉장고나 선선한 곳에 두고, 

   밀전병은 꼭 당일 부친다.


10. 밀가루(글루텐프리 가루)와 물을 1:1의 비율로 잘 섞어서 (소금 조금 넣음) 체에 한번 내리면 곱게 된다,


11. 프라이팬을 중간 불 정도로 해서, 기름 약간 두르고 수저로 한수저씩 떠 넣어 동그랗고 얇게 부친다.

    기름이 없으면 고소한 맛이 떨어지고, 너무 많으면 예쁘게 안됨에 유의할 것.


12. 이렇게 다 준비가 되었으면 구절판 용 판이나, 커다란 접시에 색을 잘 대비하여 

   볶은 재료들을 뺑 둘러 담고, 가운데에 밀전병을 놓는다.


13. 간장에 식초 조금, 후추 조금 뿌려, 찻수저를 얹어 함께 서빙한다.


14. 앞접시에 밀전병 먼저 놓고, 각종 재료를 조금씩 얹은 후, 간장 살짝 뿌려서 한 입에 쏙!

매거진의 이전글 육회를 두 근이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