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 명분을 만든 하루
그렇게 애를 써서 몽파르나스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내가 원하던 파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대략 여기에 쇼핑센터가 있다는 사실만 찾아서 온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려고 사진을 찾아봤으나, 너무 실망했던지 사진 조차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몽파르나스를 가기로 했던 것은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패션의 도시 파리에 와서 쇼핑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쇼핑을 못 하는 사람들도 한 번 둘러보고 뭔가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도를 하고자 한 것이다. 샹젤리제 같은 명품 거리에서 뭔가를 사지는 못해도, 백화점의 한 코너에서 자그마한 뭔가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착각이었다.
내가 파리에서 고학하던 시절,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 와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서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신혼이었던 그녀는 예쁜 속옷을 사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녀를 안내하러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란제리를 한 벌 샀다. 고급스러운 질감의 투피스 속옷이었고, 나는 그것을 거의 입지 않은 채 30년을 모셔두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입기 시작하였는데, 과하게 섹시하지 않고 우아한 란제리를 고른 안목에 남편이 감탄을 하였다. 란제리는 속옷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속옷 위에 입는 중간 속옷쯤 되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막연한 추억이 있어서일까? 그래서 검색한 결과, 숙소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있는 몽파르나스 타워 쪽에 괜찮은 백화점이 있다는 글을 읽었다. 몽파르나스 타워는 파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건물이라서 관광지로도 핫 하니까 근처도 뭔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중소도시의 뒷길 같은 느낌이 드는 곳에 우리는 도착했다. 백화점을 찾았으나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서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리고는 허름하게 시멘트로 지어진 지하보도를 통해야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들어가면서도 참으로 찜찜하였다. 백화점을 향해 가는 길은 제법 길었고, 도중에 세일이라는 표시를 잔뜩 붙여놓은 속옷 가게 앞을 지나쳤다. 그야말로 한국의 역 지하상가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백화점은 볼품없었다. 아, 이것을 위해서 에펠탑도 안 올라가고 샹젤리제 거리도 눈도장만 찍고 왔던가. 정말 맥이 빠졌다. 계획을 잘 세워서 왔어야 했는데, 오후 내내 걷고, 허탕 치고, 줄 서고, 그리고 큰 수확이 없었기에 속상했다.
그대로 나가기 서운해서 지하보도의 그 속옷 가게에 다시 들어갔다. 내가 사고 싶었던 것은 브래지어 끈이었다. 날이 더웠기에 민소매 웃옷이 여러 벌 있었는데, 속옷 끈이 밖으로 보일까 봐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브라의 끈이 보이는 것을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운 끈이 달린 속옷을 입음으로써 그것을 겉옷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나도 그런 끈을 사서 내 속옷에 연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끈은 따로 판매되지 않았다. 오직, 그렇게 화려한 끈이 달린 브래지어가 몇 벌 있을 뿐이었다.
꼭 구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사야지 덜 억울할 것 같아서, 그중에서 가장 독특한 끈의 속옷을 구입했다. 정말 겉옷 입을 때 바깥으로 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부러 보이게 입는 것이 목적인 옷이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얼른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어딘가 새로운 곳을 가기엔 시간이 너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기에,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프랑스적인 음식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 또 문제가 있었다. 이 지역은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식당이 테이크아웃이나 배달전문점 등이었다. 한 군데, 오래된 식당이라고 해서 찾아갔지만, 문을 열지 않았고, 간판조차 제대로 없었다. 오래전에 폐업된 정보를 구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문 열은 곳 아무 데나 들어갔다. 애매한 퓨전 음식을 하는 L'Atlantique라는 식당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기분을 내겠다고 달팽이 요리를 애피타이저로 주문했고 와인도 한잔 따로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괜찮았다. 맛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음식은 실망이었다. 달팽이는 별 풍미가 없었고, 남편이 주문한 치킨은 달달했으나 그나마 그중 나았고, 나는 참치 샐러드를 시켰는데, 풀은 하나도 없이 그릇도 아닌 반찬통 같은 곳에 담긴 채로 도마에 식빵을 구워서 나왔다. 바게트도 아니고... 에효!
우리의 여행은 첫 한주를 끝낸 시점이었고, 우리는 소비에 상당히 조심하는 상황이었기에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이런 낭패를 보았다. 노르망디와 달리 파리에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식당을 찾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전철을 타고 숙소 쪽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목표로 했던 9시는 넉넉히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어디선가 헤매고 싶지 않았고, 사실상 7시가 넘어가면 많은 곳이 문을 닫기 때문에 딱히 방문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가고 싶어도 포기한 곳이 참 많았는데, 이렇게 마지막 날을 아쉽게 보내고 말았다.
어깨가 상당히 처져버렸지만, 그래도 전날 호텔에서 서비스로 제공한 와인을 마시며 기분을 풀기 위해, 들어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렀다. 안주로 치즈라도 좀 사면 좋겠다 싶었다.
그냥 보통의 슈퍼마켓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프랑스답게 온갖 와인과 치즈가 넘치도록 많았다. 무슨 전문점을 연상케 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입을 떡 벌리고 탄성을 질렀지만, 역시 허탕의 마무리는 우리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치즈를 담당하는 직원은 일찌감치 퇴근을 하였고, 우리는 저 많은 치즈 중에서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 있는 동안 라끌레뜨 치즈를 한 번 먹어보겠다는 꿈은 오늘까지 결국 실패를 해버렸다.
다른 유제품들과 함께 그냥 일반 냉장고에서 판매되는 공장 치즈만 살 수 있었기에, 그냥 마음을 비우고 돌아섰다. 억지로 뭔가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참 의미 없게 느껴졌다.
여행을 준비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파리를 그리워했는지 조차 잊었던 것 같다. 여기에 오면 하고 싶었던 수많은 것들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채 그냥 흘러가버렸다. 파리에서 삼박사일만 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너무나 터무니없었던 것이었고, 그것도 한창 관광 시즌에 아무런 예약 없이 터덜터덜 걸으면서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옛날에 잠시 살았던 동네인 숙소 근처를 다시 한번 기웃거렸지만, 그 건물은 찾지 못했다. 나중에 내 수첩 어디선가 그 주소를 찾을 수 있긴 할까? 하긴 찾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숙소에서 서비스로 준 저렴하고 달달한 와인을 안주 없이 홀짝거리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기다리고 있는 베니스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