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노바스코샤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간 생일상
캐나다 서쪽 끝에 사는 우리 부부는 이번 여름에 동쪽 끝 노바스코샤를 방문했다. 코로나로 인해 2년째 미루다가 드디어 가게 된 가족 대화합 모임. 날짜는 시누님의 생신에 맞춰서 결정되었다. 올해 77세가 되는 시누님은 노바스코샤의 바닷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홀로 사신다.
누님 댁 구경은 여기서 :
나는 시누님을 결혼 전에 한 번, 그리고 결혼식 때 한 번 뵈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 댁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식들도 각자 그곳으로 집합하기도 되어있어서 남편도 들뜬 이번 방문. 그중에서 우리 부부가 일등으로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바로 그다음 날이 시누님 생일이었다. 그래서 가족 모임 행사 이전에 간단하게 생일을 축하하는 저녁식사를 애들 오기 전에 먼저 하자고 남편이 말했다. 이미 누님과의 통화를 그렇게 마친 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면 생신상을 한국식으로 차리면 어떨까?"라고 물었다. 내가 그곳에 가는 일도 흔하지 않거니와, 딱 생일에 맞춰서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의 눈이 둥그레지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다시금 누님께 전화를 걸어서 의향을 물었다.
누님도 신이 나셔서, 그러려면 장을 뭘 봐 놓아야 하고 반갑게 물으셨다. 그러고는 다시, 친구분도 한 명 불러도 되느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4명의 생일상 계획이 잡혔다.
막상 일을 벌여 놓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에서야 모든 재료가 다 있으니 생일상 차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한국 마트도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은 노바스코샤의 시골에서, 무슨 재료를 가지고 상을 차릴까 하는 고민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식으로 한다면 차려야 할 음식이 정말 많겠지만, 서양인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반찬 가짓수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 모두 노인들이니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도 않으니 단출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상을 차리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메뉴는, 미역국, 녹두전, 잡채를 메인으로 정했다. 생일이니 미역국이 빠지면 서운하고, 서양인들에게는 잡채와 녹두전은 언제나 인기 메뉴다. 특히 녹두전은 예전에 남편 큰 딸 생일에도 준비해서 히트를 쳤던 음식이다. 옛날 유행가 가사에서,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먹지"라고 했지만, 사실 잔치상에서 녹두전은 빠질 수 없는 메뉴 아니겠는가.
그밖에 겹치는 재료들을 이용해서 시금치, 숙주, 고사리나물을 얹고, 호박볶음도 추가했다. 김치가 빠지면 섭섭하지만, 우리 집의 김치는 너무 시었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그냥 상추로 겉절이를 추가했다.
디저트도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촉박하게 정해서 여력이 없었기에, 한인 마트에서 한과와 약과를 구매했다. 우리 같으면 떡도 좋겠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인기 있는 메뉴가 아니다. 찰진 음식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다행히 마른 디저트들이 준비해 가기 훨씬 쉬웠다.
출발 전에 꼼꼼히 재료를 정리했다. 녹두, 미역, 고사리, 목이버섯, 표고버섯, 한국 쌀 같은 마른 재료부터, 참기름, 간장, 깨, 고춧가루, 새우젓 등의 양념도 챙겨야 했다. 녹두전에 들어갈 소량의 신김치도 꼭 짜서 밀봉 포장했다. 술도 빠질 수 없으니 소주를 한 병 구매했다. 원래 짐을 한 개만 부치려 했는데, 집에서 만든 와인까지 넣으니 무게가 넘어서 가방이 두 개가 되어버렸다. 수저도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집에 있는 것을 챙겨 넣었으니 그 무게도 적지 않았다.
노바스코샤로 가는 비행기는 밤샘 비행기였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도착한 핼리팩스 공항에 시누님이 데리러 나와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낮잠을 한숨 자고는 저녁 식사 후 잔치상 준비를 시작했다. 한식은 원래 준비가 전날부터 이어지지 않는가! 시누님께 부탁했던 시금치와 양파, 파, 마늘, 숙주나물, 그리고 등심 소고기 한 파운드까지 다 마련된 상태였으니 어려움이 없었다.
저녁때에 고사리를 먼저 삶아서 불려놓고, 고기는 미역국 용, 잡채용, 녹두전 용으로 삼등분해서 미리 해두었다. 고명 용으로 들고 온 말린 대추도 돌려 깎아서 꽃잎 모양으로 잘라두었다. 시누님은 고사리와 미역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전날부터 준비를 한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드디어 생일 아침. 녹두도 불리고, 미역이랑 당면도 불리고, 버섯들도 불렸다. 고사리는 씻어서 손질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했다. 숙주는 삶아서 반은 나물로, 반은 녹두전 용으로 준비, 시금치도 데쳐서 반은 잡채용, 반은 나물로 준비했다. 고사리 역시 다듬어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나서, 반은 녹두전 용으로 빼두고, 나머지 반은 볶아서 나물로 준비했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게 중요했다.
불린 녹두를 미니 믹서기로 갈아서, 거기에 고사리, 숙주, 김치 꼭 짠 것을 넣어서 반죽을 했다. 보통은 돼지고기를 넣지만, 이번엔 간편하게 쇠고기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미역국은 고기와 양파를 넣어서 끓이고, 호박은 납작 썰어서 양파 좀 넣고 새우젓 넣어서 볶았다. 잡채는 저수분 방식으로 해서 간단히 한 솥에 쪄내게 준비를 완료했다. 잡채와 녹두전은 따뜻하게 상에 올리고 싶었다.
시누님은 어떤 그릇에 서빙할지를 고민하며, 내게 이것저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접시를 정해서 포스트잇으로 이름을 붙여서 상 위에 시뮬레이션을 했다.
드디어 손님이 도착했다. 그분은 이 특별한 생일 디너에 자신이 특별히 초대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분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식 생일상을 받는 시누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부지런히 녹두전을 부치고, 잡채를 쪄냈다. 상차림이 완성되자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양식은 각자의 접시를 안고 먹지만, 한식은 상 위에 벌여 놓으니 이처럼 가짓수가 많지 않아도 근사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이 커서 대부분의 음식을 두 접시씩 담았으니 더 거창해 보였다. 한국식 7첩 반상 같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소주로 건배를 하고 먹는 저녁식사는 정말 즐거웠다. 모든 것이 새로운 맛이다 보니 하나하나 음미하며 드시는 시누님과 손님을 보면서 보람이 밀려왔다. 잡채도 인기가 있었지만, 녹두전은 정말 히트였다. 영어로 녹두 팬케익(mungbean pancake)이라고 불렀으나 서양식 핫케익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아니던가! 특별한 질감과 더불어 그 안에 들어간 김치, 숙주, 고사리 등이 색다른 풍미를 주었으리라.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를 내놓았다. 선물을 풀면서 먹는 디저트도 인기가 좋았다. 속이 빈 한과는 바삭하면서 달콤하고, 약과는 쫀득하면서 달콤하니 한식의 디저트로 아주 좋았다.
연신 맛있다며 식사를 마친 손님은, 나중에 녹두전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고, 시누님도 역시 레시피를 궁금해했기에 우리는 급기야 영어로 레시피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한국 요리를 전혀 모르시니, 자세한 손질법을 붙여서 세세히 써드렸다. 그리고 녹두는 아마존으로 주문해서 미리 챙겨드렸더니 기뻐하셨다.
넉넉히 준비했기에 음식이 제법 남았기에, 녹두전과 잡채는 나중에 우리 떠난 후에 다시 드실 수 있게끔 포장해서 냉동실에 넣어드렸다. 엊그제 전화드렸더니, 마침 남아있던 소주를 곁들여서, 생일상의 여운을 다시 즐기셨다고 말씀하셨다.
시댁의 텃세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 마음 넉넉한 시누님이 즐거워하셔서 우리도 좋았다. 결국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는 법은, 좋아하는 사람과 나눠 먹는 것 아니겠는가! 이로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추억이 생긴 것도 또한 즐거움의 하나였고 말이다!
13~15cm 지름 6장 분량
재료:
깐 녹두 2컵 + 불리는 물 2컵~2컵 반 정도
숙주 1봉, 데쳐서 꼭 짜준다
고사리, 물에 불려서 1/2컵 (옵션)
김치, 종종 다지듯 썰어 살짝 짜준다, 1컵
쪽파 3개 정도 다져서 준비
마늘, 다져서 1작은술
고기, 다져서 갖은 양념해둔다, 1/2~1컵
타피오카 전분 2큰술(옥수수 전분 1큰술)
소금 1작은술
후추 약간
마른 대추나 청홍고추 장식용 (옵션)
만들기:
1. 먼저 깐 녹두를 물 조금만 잡아서 4시간 이상 불린다., 불린 남은 물은 버리지 않고 남겨둔다.
처음부터 물을 많이 넣지 말고, 처음에 2컵 넣은 후 불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모자란다 싶으면 조금씩 더 넣어주는 것이 좋다. 다 불었을 때, 물이 녹두에 자박자박한 정도면 적당하다. 물까지 다 쓸 거니까.
2. 그동안 다른 식재료를 준비한다. 숙주는 끓는 물에 데치듯 삶아서 물기 짜준 후 성큼성큼 잘라준다.
3. 마른 고사리는 찬물에 넣고 끓기 시작하면 5분 정도 끓인 후, 불을 끄고 밤새 불린다.
그렇게 부드럽게 준비된 고사리도 역시 성큼성큼 잘라준다.
(나물용으로 준비된 고사리는 그대로 사용 가능)
4. 김치도 물기를 짜 준 후, 크지 않게 잘라준다.
5. 파 마늘도 송송 썰고, 다져서 준비한다.
6. 고기는 돼지고기가 목살 같은 부분이 좋은데, 없으면 소고기도 괜찮다.
2~3cm 길이 정도로 채 썰거나, 다져도 괜찮다. 다짐육을 사용해도 좋다.
미리 파 마늘 간장으로 갖은양념을 해둔다.
7. 녹두가 다 불었으면 푸드푸로세서에서 갈아준다. 믹서기도 사용 가능하다.
이때 너무 뻑뻑하면 녹두 불린 물을 조금씩 넣으며 간다. 딱 갈리기 좋을 만큼만 물을 넣는다.
8. 이때, 타피오카 전분 2큰술 정도 넣어서 같이 돌린다.
9. 넉넉한 사이즈의 볼에 옮기고, 남은 속재료를 모두 넣어서 섞어준다.
푸드프로세서로 갈았다면 반죽이 너무 될 수 있으니 추가로 녹두 불린 물을 섞어 반죽을 농도를 조절한다.
한꺼번에 넣지 말고 상태 봐가며 한다.
다짐육으로 준비했다면, 고기는 마지막에 넣어서 살짝만 섞어준다.
고기가 씹히길 원한다면, 반죽을 두른 후, 위에 고기를 따로 얹듯이 뿌려줘도 좋다.
10. 프라이팬을 잘 달군 후, 기름을 넉넉히 붓고, 기름이 뜨거워지면 반죽을 국자로 떠 넣는다.
11. 살살 다독여 둥근 모양을 만들되 꾹꾹 누르지 않는다.
원하면 청홍고추 고명을 올려 색을 예쁘게 해도 좋다. 대추를 세로로 썰어서 꽃처럼 꾸며도 예쁘다.
12. 자꾸 뒤집으면 맛이 없으니, 한 면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만 뒤집어서 완성한다.
기름이 넉넉해야 맛있으므로, 모자라면 중간에 테두리로 보충해 넣는다.
13. 양념장을 곁들여 낸다. 전에 소개한 오이 간장 피클의 오이와 양파를 곁들인 간장을 내면 더욱 좋다.
(https://brunch.co.kr/@lachouette/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