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조촐하게...?
작년 이맘때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짐을 싸서 캐나다로 왔다. 예측불허의 한 해를 보낸 후, 마지막 도박이었다. 무모함이 나의 키워드라고 말해도 될 만큼 나는 무모한 사람이지만, 정말 가방 두 개 챙겨서 서울 집 짐들을 그대로 두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공항에는 다연이와 지금의 남편이 마중을 나왔다.
나의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두 사람이 맞이해주는 곳에 와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결국 여기서 결혼도 하고, 영주권도 받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관광비자로 입국 했기에 왕복 비행기표를 사서 왔는데, 나머지 반쪽 표를 며칠 전에 드디어 캔슬하고, 표값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금이라도 환불받았다.
별 기념일을 다 챙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서 이 날은 참 특별한 날이고, 그냥 지나가기엔 서운하여 간단히 케익이라도 굽고 축하하고싶다고 했다. 남편은 고민하면서,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라도 하자고 했지만 이미 다음날로 다가온지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는 결국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고, 남편이 저녁을 차려서 집에서 분위기 내서 먹자고 결론을 내렸다. 즉, 저녁식사는 남편이 책임지고, 나는 케이크를 구워서 디저트를 하는 걸로...
당일날, 나는 낮에 케이크를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따뜻하면 장식을 할 수 없으므로 미리 구워서 충분히 식혀야 했는데, 아침에 바쁜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오후에 굽느라 더욱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귀가하자마자 요리를 시작했다. 준비하면서, 필요한 재료들을 쭉 늘어놓고, 식사 단계 단계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날 저녁은 이태리 풀코스로 꾸며졌다.
안티파스토 - 프리모 - 세콘도 - 치즈 플레이트 - 디저트로 진행된 식사는 여느 고급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이탈리안 코스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외식하려면 돈 왕창 깨질 텐데, 그보다는 저렴하게 이렇게 집에서 할 수 있었고, 우리 둘만의 식당이니 이보다 고급스러울 수 있겠는가!
평소에는 부엌에 있는 작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만, 이 날은 모처럼 다이닝룸에 식탁보를 깔고, 초도 켜도, 은식기도 꺼내면서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남편이 퇴근길에 사들고 들어온 장미꽃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촛불로 장식하고, 핑크빛 식탁보에 리넨 냅킨이 놓였다. 접시는 노리타케 Paris 세트. 평소에는 진열장 안에만 들어있는 것인데, 간만에 빛을 보았다.
안티파스토(antipasto)는 이태리 식사에서 식전 코스로 나오는 음식인데, 여러 가지 햄과 치즈, 소스에 잰 야채류가 나오는 음식이다. 우리는 두 가지 올리브와 몇 가지 햄 종류, 그리고 부드러운 치즈를 얹었고, 샴페인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코스는 1차 코스인 프리모(primo)로 파스타를 먹을 차례이다. 이태리에서는 정식 코스에서 파스타를 먼저 약간 먹고, 그다음에 메인 코스로 들어간다. 밀가루 없는 우리 식탁에서는 키노아로 만든 지티를 사용했고, 알프레도 소스에 새우를 넣어 파스타가 준비되었다. 여기에 와인은 보르도 레드와인이 곁들여졌다.
그리고 드디어 본식 세콘도(secondo)로 들어갈 차례이다. 남편이 부엌에서 준비를 하고 가져온 것은 생선요리였다. 우리는 둘 다 해산물을 좋아해서, 오늘의 주제는 해산물이었다.
연어와 대광어를 크림소스에 익혀서 부드럽게 먹는 요리였고,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샐러드도 색을 맞춰 적색 상추와 푸른 야채를 같이 사용했다. 생선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여기까지 먹고 나니 정말 정신없이 배가 불렀지만 아직 오늘의 코스가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치즈 플레이트. 식사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치즈는 빵과 함께 서빙되지만, 역시 빵을 먹지 않는 우리는 빵을 생략하고 과일을 곁들였다. 서양배와 포도가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치즈가 입을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여기까지 남편의 활약이 끝나고 이제 내 차례인 디저트가 나올 타이밍이 되었다.
케이크는 브라우니 타입으로 묵직하게 구웠고, 위에는 가나슈를 만들어서 장미무늬로 장식했다. 역시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조지안(Gerogian) 스타일 접시에 담았다. 그냥 넘어가기 아쉬우니 초를 하나 꽂았다. 캐나다 온 지 1년 기념되는 날이니까 하나의 초를 꽂는 것으로... 매년 하나씩 키워가겠지?
남편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웃느라 정신없는 사진이 잡혔다. 작년에 여기에 올 때에는 설렘이었다면, 지금은 행복이다. 항상 점점 더 잘해주는 남편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사실 가까워지면서 사람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마련인데, 우리는 많은 부분 닮아서 또 그만큼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무산된 외식이 우리의 저녁을 번거롭게 만들려나 했지만, 정말 저녁 내내 식사하면서 많이 웃고, 많이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별거 아닌 날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소홀히 넘기지 않고 이렇게 챙김으로써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확인하는 수순이 되었다. 원래 간단히 저녁 먹고, 트리 꾸미자고 했지만 트리는 결국 다음날로 미루고 저녁 끝까지 벽난로 앞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로맨틱하게 마무리했다.
내년엔 또 오늘을 돌아보며 추억하겠지. 그때는 또 어떤 추억을 만들려는지 벌써 기대가 된다.
* 케익 만들기 레시피 올렸습니다 (https://brunch.co.kr/@lachouette/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