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r 13. 2020

해피 발렌타인데이!

기쁨을 준다는 것은, 기쁨을 받을 줄 안다는 것

열심히 포스팅을 하려고 해도, 바쁘거나 신경 쓸 일이 있으니 밀리게 된다. 어떨 때에는 쓸 것이 없던 적도 있었는데, 요새는 넘치는 쓸거리를 주체를 못 해서 계속 밀리고 사라지고 있다. 이것을 즐거운 고민이라 해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소중한 추억거리들이 머릿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까... 급한 마음에 제목과 요약을 적어놓은 쓰다 만 글들이 벌써 스무 개가 넘는데 다 어쩐다? 게다가 작년 신혼여행일기는 잠점 휴업상대...흑!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에는 책을 하나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지금은 보다 많은 추억과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쓰는 글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편안함을 주고, 동시에 쓸만한 정보도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래서 여러 가지 글 중에서도 요리 레시피를 제일 많이 올리게 되는 것 같다.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너무나 밀려버린 발렌타인데이 일기다. 벌써 한 달이 지났으니 한국에서는 이제 화이트 데이라고 할 타이밍인데, 나는 여적 발렌타인데이 타령이다. 아니, 요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화이트 데이도 조용할 듯하다. 어디서든 사람 모이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니 외식도 자제하고, 상가도 조용하기만 하다는 말에 다들 참 힘들겠구나 싶다.




올해의 발렌타인데이를 기록하자면, 우선 내게 발렌타인데이는 전혀 로맨틱한 날은 아니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가끔 발렌타인 베이킹을 하곤 했지만, 그냥 놀이일 뿐이었다. 마카롱 같은 것들을 구워서 아이 학교에 선물을 돌리거나 하는 정도였다. 나는 무덤덤한 여자로 살아왔고, 나의 로맨틱에 제대로 장단 맞춰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나서 나는 많이 로맨틱한 사람이 되었다. 작은 일에 크게 감동하고 또 크게 표현하는 그와 있으면 나도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만다. 그래서 상술에 휘둘린 이런 날에도 좀 로맨틱해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내게 항상 정성을 다 하는 남편에게 뭔가 좋아할 만하고 깜짝 놀랄만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서 발렌타인데이의 상징은 초콜릿이지만, 나는 다른 것을 먼저 생각했다. 남편은 을 참 좋아한다. 우리 처음 연애하던 시절, 남편 생일이었는데 멀리 떨어셔 있어서 못 갔건만, 오히려 남편이 내게 꽃다발을 보내왔다. 그 꽃다발은 내 평생 처음으로 받은 꽃배달이었다. 그냥 이런 것은 돈 낭비라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살아왔던 긴 세월에서 벗어나, 놀라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그의 집에 방문할 때에도 그는 꽃을 꽂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꽃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알게 되었다.


내 평생 처음 받아본 꽃배달


남편이 특히나 좋아하는 꽃은 아이리스. 그래서 발렌타인 기념으로 아이리스가 들어간 꽃다발을 선물하기로 했다. 미리 근처에 있는 꽃집으로 직접 꽃병을 들고 가서 주문을 했다. 배달도 해주냐고 물었더니, 발렌타인데이에는 당연히 배달을 한단다. 


꽃은 세 가지로 선택을 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아이리스, 우리 결혼식 때 사용했던 하얀 장미, 그리고 향기가 풍부한 백합... 주문을 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다. 아이리스 대신에 다른 꽃을 넣으면 안 된다고 확실하게 다짐을 받았다. 예전에 한 번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가 아이리스 대신에 스타티스가 와서 정말 정말 실망했었고 속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굳이 직접 꽃집을 골라서 방문한 것이다. 사흘 전에 미리 가서 예약하고, 오전 11시에 배달받기로 약속하고 나오는데 괜스레 막 신이 났다. 집에 와서는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꾹 참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 더 만드는 바람에 양이 두배가 되어버린 초콜릿


그리고 그것으로는 어쩐지 서운해서 초콜릿을 만들었다. ( 만드는 법은 따로 쓸 예정 ) 한국에서는 파베 초콜릿이라고 불리고, 이곳에서는 트러플 초콜릿이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초콜릿이다. 사실 야심 차게 새로운 모양으로 시도를 했다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아서 새로 다시 만드느라 시간이 모자라서 애를 먹었다. 덕분에 양은 두배가 되었지만, 게다가 발렌타인 전날이 남편 치과치료 날이어서 출근을 안 하는 바람에 몰래 준비 완료하느라 혼이 빠질 뻔했다! 마취하는 긴 진료였기에 치과에 데려다 놓고 집에 정신없이 와서 마무리하고 포장 끝내 놓고 헐레벌떡 데리러 가느라 눈썹 휘날리는 발렌타인 이브를 보냈다.

무엇부터 먹을까?

포장한 초콜릿은 침대 밑에 숨겨두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줘야지 생각했는데, 남편이 선수를 쳤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초콜릿 주는 날로 알려져 있지만, 서양에서는 서로 주는 날이고, 사실상 남자가 여자에게 더 많이 선물하는 날이다. 백화점 가보면 사방에 목걸이 반지 등등 팔면서 발렌타인 행사를 한다. 남편이 내민 상자에는 캐미솔 상하 세트가 들어있었다. 여자들이 예쁜 거 좋아해도, 이런 거에는 돈 안 쓰니까, 이쁜 거 입으라고 선물해준 것이었다. 부드러운 촉감이어서 블라우스나 원피 속에 입기 좋은 재질이었다. 살다가 이런 선물도 다 받아보네. 하하!


남편도 내가 만든 초콜릿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작고 귀엽게 포장한 상자와 큼직하게 많이 담긴 상자를 나란히 들고, 질이냐 양이냐를 물으며 장난을 쳤다. 하나 가득 모아놓으니 나름 그럴듯했다. 원래 출근하는 날이지만, 전날 치과치료를 받고 이날까지 월차를 내고 쉬기로 했기에, 우리는 침대에서 초콜릿을 먹으면서 게으른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휴일 아침이면 침대에 누워서 커피 마시며 뉴스 듣는 것을 좋아한다. 


딩 동 ♬


그리고 열 시 반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초인종 소리는 대부분 잡상인이거나 포교인들이기에 문 열기 싫어하는 남편을 억지로 현관으로 내밀었다. 나보다 당신이 나가보라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가운만 걸치고 가서 문을 열은 남편의 웃음소리가 이층까지 들려왔다. "너무 일찍 와서 죄송해요, 11시에 배달하기로 했는데..."라는 배달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남편은 땡큐를 연발하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재미난 이벤트에 업 된 우리, 나는 꽃을 주는 것도 꽃을 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데, 꽃을 선물하는 것이 이렇게 로맨틱하고 감동적일 수 있을지는 남편을 통해 처음 배웠다. 


신신당부했던 덕에 꽃다발에는 아이리스가 한가득 있었다. 그리고 하얀 장미와 백합까지 해서 아주 풍성한 꽃다발이 도착을 했다. 남편이 푸른색을 좋아한다 했더니 푸른 수국을 추가로 넣어서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꽃다발이 이렇게 럭셔리해 보일 수가!



사실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선물이 무엇인가가 뭐 그리 중요할까? 다만 그 선물을 준비하는 설렘과, 그것을 받아서 한 껏 기뻐하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형편이 되면 되는 만큼 준비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떠올리며 신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 이리라. 그리고 그 준비한 마음을 최고로 올려주는 것이,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표현인 것 같다.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당신은 이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모를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하는 남편을 보면서, 준비하느라 종종거렸던 그 모든 순간들에 얹어서 두배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갈 수 있었던 그 순간이 내겐 또한 그렇게 큰 의미가 되어서 돌아왔다. 김춘수 님의 시처럼, 꽃,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하나의 의미가 되듯이 말이다. 

이전 08화 그대는 달빛 같은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