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되면 한 시간 뒤에 퇴근을 앞둔 나의 몸은 시간을 기억하고 벌써 집에 갈 준비를 한다. 저녁은 뭘 먹을지, 또 어제 계획했던 영어 라디오 듣기, 블로그에 포스팅하기처럼 상상 속의 대단한 에너지로 지키지 못할 계획을 세운다. 아침형 인간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일어나서 ‘내’가 퇴근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고 한다. 이런 것을 미라클 모닝이라 하는데 난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출근하는 것 자체가 미라클이라 생각한다. 워낙 잠이 많아서 잠 때문에 인생이 잘못될 뻔했던 경험이 많다.
대신 나에게 저녁은 퇴근 후 5시 30분부터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되는 시점이다. 직장인의 내가 아니라 하루 중에 온전히 나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직장에서 뱉지 못했던 말을 글로 쓴다.
25살, 35일 동안 유럽 여행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기 있는 관광지부터 시작해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점 투어, 여기는 꼭 가봐야 한다는 패키지 투어를 따라다니며 정말 바쁜 하루들을 보냈다.
그때도 나의 저녁은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마법의 액체, 맥주를 들이켜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종일 걸어 다녀서 발바닥은 터져 양말이 찢어질 것 같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니느라 어깨는 바위로 내리 찧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초인의 힘을 발휘해서 그 도시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야경을 감상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백야현상이 있다. 밤 9시가 돼도 한낮처럼 하늘이 밝고 사람들은 달리기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나도 그 백야의 한 저녁을 함께했었는데 시곗바늘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열심히 돌아도 어둠은 오지 않았다.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 기분이었다. 꿈을 꾼 것처럼 눈을 감고 일어나도 영원히 하루가 지속하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남들에게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저녁은 나에게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전환점일 뿐이다.
회사에서의 '나'와 회사 밖에서의 '나'를 구분하는 때는 저녁 시간으로 정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