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꽃을 사다 화병에 꽂아둔다. 그냥 예뻐서. 남편과 연애할 때도 쓸데도 없고 둘 데도 마땅찮고 버리기도 귀찮다며 꽃 선물은 마다했는데, 요즘 들어 내 돈 주고 꽃을 사곤 한다. 여전히 쓸데도 없고 둘 곳도 애매하지만 그러고 있다.
그건 어느 날 문득 불어온 기분 때문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사치란 것을 부려보고 싶은 기분. 이 나이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정말 그래야 하는 건지 지금도 동의할 수 없는) 명품백 하나 없고, 호캉스가 유행을 해도 내 집 내 침대가 더 좋다며 쳐다보지 않고, 보석이라고는 아직도 보석바밖에 모르는 인간이지만 사치를 부리고 싶은 때가 가끔 있다. 바르지도 않을 예쁜 립스틱을 하나 사보거나(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꽂지도 않을 예쁜 머리핀을 사는(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기 때문에 핀을 꽂아봤자 날라간다) 정도의 사치다. 사치라는 건 효용에 비해 비용이 크지만 자신의 만족감과 기분 향상을 위한 것일 테니, 사치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나 자신을 무언가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그 마음 자체는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엔 꽃을 골랐다. 명품백은 물건을 넣어 다닐 수라도 있고, 호캉스를 가면 호텔 물건들을 이용할 수라도 있고, 보석을 사면 치장하고 나중에 되팔 수도 있겠지만, 병에 꽂혀서는 존재하는 것 외에 써먹을 데 없는 꽃이야말로 사치하기 딱 좋겠다 싶었다.
꽃집에서 이천 원짜리 튤립 한 송이를 사 온 것이 시작이었다. 작은 유리병에 덜렁 꽂아 TV 옆에 두고 보니 오동통한 꽃송이가 귀여워 보였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는데, 보들보들한 꽃잎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했다. 찾아보니 매일 물을 갈아주고 줄기 끝을 조금씩 잘라주면 오래 볼 수 있다 하여 그리했다. 일주일 넘게 TV 옆을 지키던 튤립이 시들어 잘라 버리면서 인터넷으로 다음 꽃을 주문했다. 택배박스에 곱게 포장되어 나에게 온 한단의 라넌큘러스는 이주일을 함께했다.
참으로 사치로웠다.
어차피 시들어 버릴 꽃이지만, 그래서 피어있는 동안이 더 소중하다. 나 역시 어차피 사라질 생명체이지만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이 더 중요하듯이. 매일매일 꽃잎은 잘 펼쳐지는지 살펴보고 더워서 지쳐하면 꽃병에 얼음도 하나 띄워주면서 아껴주어야 한다. 그래야 시들어 버리는 그날에, 덕분에 즐거웠다, 예쁘게 펴주어 고맙다 말할 수 있다. 네 어여쁨을 내가 열심히 잘 지켜보았다 말해줄 수 있다. 어차피 시들 꽃이니까, 이왕이면 내가 맘껏 좋아하고 아껴주고 알아봐 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