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일찍 일어나라는 말이 참 싫었다. 세트로 따라오는 게을러서 어디다 쓰겠냐는 말도 듣기 불편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하루 일과 전체를 보면 게으른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늦잠 잤다는 이유로 한번에 게으른 놈이 되어야 하다니 부당했다.
나이를 먹는 건 잔소리의 내용을 성장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일찍 일어나라', '공부 열심히 해라'하는 잔소리는 '취업해서 빨리 자리잡아야지'하는 잔소리로 성장했고, 곧이어 '결혼은 언제 할거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잔소리로 성장한다. 아이를 낳으면 '애 그렇게 키우는거 아니다'라는 잔소리로 성장하곤 하던데, 애를 낳지 않아도 내 잔소리는 '몸이 그래서 어쩔 셈이냐'로 변했다. 아이를 잘 키우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않는 한 잔소리의 족쇄에서 벗어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시작은 대부분 관심과 애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일상에 관심이 있음을 표현하고 싶고 너의 인생 경로에 함께 하고 싶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다만 표현의 방법을 다들 잔소리의 언어로 배워버린 것 같다. 더 격하게 걱정하고 잔소리 하는 것이 더 강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듣기 싫은 말도 조용히 듣고 넘기는 건 그 말이 시작된 감정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잘 하고 있구나' 혹은 '네 방식도 재미있는 걸' 하는 식의 응원과 격려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 방식을 학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표현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네가 잘 되든 못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오역되기도 한다.
같은 흐름에서 자신이 아는 적절한 조언을 곁들여주지 않으면 상대에 대해 무책임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조언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언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까지 완료해야 속이 개운해지는 사람들이 곧잘 조언을 넘어 간섭에 이르게 된다.
아주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조언을 상대가 수용하게끔 하는 노력까지 하는 것이 상대에게 온전히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흔하다. 상하관계에서는 특히 두드러지는데, 부모자식관계가 가장 대표적이며(교육이 필요한 시기의 어린 자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사제관계나 선후배관계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구에서 강요하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돌봐주어야 할 대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서 그런 사람이 많고, 그것은 그들 자신이 그렇게 배우고 간섭받아왔기 때문이다.
'지나고보니 어른들 말이, 선배들 말이 다 맞더라' 라는 건 80%의 확률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언을 늘어놓는 것을 넘어서 수용하기까지를 원하는 건 욕심이 과하다. 20%의 틀린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답이 뻔한 일이더라도 스스로 원하는 길로 가서 겪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이며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게 하는 간섭이라면, 이미 잔소리의 시작지점인 관심과 애정을 벗어난 셈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자율적 인생을, 껍데기만 남은 종속적 인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나 역시 관심을 잔소리로 표현하는 방식에 오랜 시간 학습되어왔다. 말 습관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경계를 놓치면 어느새 간섭하고 있기도 한다. 관심의 표현으로 좋게 들으려고 하면서도 거슬리고 또 그렇게까지 애써서 말하는데 따라주어야 하나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잔소리는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일이다. 너무도 중요한 각자의 생에 대한 인식을 놓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