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법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한 청년이 다가왔다.
스물셋쯤 되어 보였는데, 어딘가 익숙한 눈빛이었다.
"저... 보육원 출신이에요. 퇴소가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대 위에서 희망을 노래했지만, 정작 눈앞의 청년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이야기가 위로가 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위로만으로는 부족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말이 아니라 따뜻한 밥이니까.
며칠 후, 나는 여러 보육원과 그룹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퇴소를 앞둔 아이들을 만날수록 답답함은 커졌다.
열여덟 살.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
"뭐 하고 싶어?"
"모르겠어요."
"꿈이 뭐야?"
"그런 거 없어요."
대부분의 대답이 그랬다. 꿈을 꿀 여유가 없었던 아이들. 생존이 먼저였던 아이들.
그중에서도 더 가슴 아픈 건 학대나 영양실조로 발달이 늦은 아이들이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길이 있었다.
하지만 평균 이하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암 환자가 암 환자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버려진 아이가 버려진 아이의 마음을 안다.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자산이었다.
그렇게 '멘토 브리지'가 시작됐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작은 꿈과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어른들을 연결하자는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한 여자아이가 수줍게 말했다. 나는 내가 아는 미용사에게 전화했다.
"선생님, 재능은 모르겠는데 열정은 있는 아이가 있어요. 한 번 만나주실래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아이에게는 뮤지션 친구를,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는 셰프를 연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보였다. 멘토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아이들은 소수였다.
대부분은 더 기본적인 것이 필요했다. 먹고사는 것. 생존 그 자체.
어느 날, 멘토링을 받던 한 아이가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찾아가 보니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고 했다.
"멘토링 계속하고 싶지 않아?"
"배고파요. 일단 먹고살아야죠."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맞다. 일단 먹고살아야 한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이 먹고살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학력이 낮아도 할 수 있는 일.
"떡볶이나 팔까?"
농담처럼 시작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기술을 배우기 쉽고, 자본금도 적게 들고, 무엇보다 따뜻한 음식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니까.
처음엔 푸드트럭으로 시작했다.
퇴소한 아이 둘과 함께. 하나는 요리를, 하나는 서빙을 맡았다.
나는 옆에서 이것저것 가르쳤다.
"손님이 오시면 먼저 인사해. 눈을 맞추고."
"떡볶이는 이렇게 저어야 눅눅해지지 않아."
"거스름돈은 꼭 확인하고 줘."
기본적인 것들이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가정에서 배웠어야 할 것들을 스무 살이 되어서야 배우는 아이들.
푸드트럭은 여러 문제에 부딪혔다.
단속, 주차, 날씨... 그래서 결심했다. 제대로 된 가게를 만들자.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분식집을 열면서 나는 원칙을 세웠다.
이곳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다. 시설 퇴소 아이들의 '일터'이자 '배움터'이고 '쉼터'다.
여기서 일을 배우고, 돈을 모으고, 언젠가는 자기 가게를 낼 수 있도록.
처음 온 아이들은 대부분 위축되어 있었다.
손님과 눈도 못 맞추고, 주문도 제대로 못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커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사장님, 오늘 제가 떡볶이 만들어봐도 돼요?"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석 달째 일하는 아이였다.
처음엔 그릇 닦는 것도 겁내던 아이가.
"그럼, 해봐. 실패해도 괜찮아."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좀 짰지만, 먹을 만했다.
"잘했어. 내일은 더 잘하겠지?"
아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어느 날, 일하던 아이 하나가 물었다.
"사장님은 왜 이런 일을 하세요? 돈도 안 되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좋아."
정말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들의 눈에 희망이 생기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생산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도 성장한다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졸업생들이 생겼다.
어떤 아이는 다른 식당에 취직했고, 어떤 아이는 작은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그들이 찾아와 자랑스럽게 말할 때면 가슴이 벅찼다.
"사장님, 저 이제 월세 내고 살아요!"
"사장님, 제가 번 돈으로 동생 학원비 냈어요!"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몇 명이나 도울 수 있겠어요?"
나는 대답한다.
"한 명이라도 충분해요. 그 한 명의 인생이 바뀌는 거잖아요."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다. 대단하지 않다.
작은 분식집에서 몇 명의 아이들과 떡볶이를 만드는 것.
하지만 그 작은 일 속에 내 모든 사랑을 담는다.
연결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 그것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내가 받은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고,
내가 걸어온 길을 통해 그들이 걸어갈 길을 비추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가게에는 새로운 아이가 왔다. 열아홉 살, 일주일 후 보육원을 나간다고 했다.
겁에 질린 눈빛이 스무 살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시작하면 돼. 천천히, 하나씩."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지만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놓는 다리다.
상처에서 상처로, 아픔에서 아픔으로, 그러나 결국은 희망에서 희망으로 이어지는 다리.
떡볶이 냄새가 가게를 가득 채운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다.
하지만 이 평범함 속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