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똑같은 일을 경험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이 된다.
내가 여유롭게 운전할 때, 정신없이 끼어드는 차를 보면 '미쳤나' 싶다.
그런데 정작 내가 급할 때는? 내가 바로 그 '미친' 운전자가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신나는 선물이었고, 연인과 함께라면 낭만의 극치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하늘이 뿌리는 쓰레기 더미였다.
똑같은 눈이지만 누릴 입장과 치워야 할 입장의 차이는 이토록 크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다는 것이다.
뷔페식당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
어르신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습이 늘 불편했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러 음식을 꾹꾹 눌러 담으신다. 음식들이 서로 섞여 맛도 이상해질 텐데, 여러 번 가져올 수 있는데 왜 굳이 저렇게 하실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가 뷔페에서 그렇게 음식을 담으시는 걸 보며 물어본 적이 있다.
"할머니, 천천히 여러 번 가져와서 드셔도 괜찮아요."
할머니는 쑥스러운 듯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다리가 아파서 자꾸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어. 그리고 사람 많은 데 비집고 다니는 것도 피곤하고."
그때 처음 알았다. 아,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당연한 것임에도 난 미처 몰랐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기본 귀인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볼 때 그 사람의 성격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상황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어르신들이 음식을 많이 담는 건 '욕심' 때문이 아니라 '불편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나도 예전 같지 않다. 뷔페에 가면 첫 접시에 좀 더 많이 담게 된다.
아직 어르신들처럼은 아니지만, 왜 그러시는지는 이제 안다.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그렇다.
살면서 이런 순간들이 참 많다. 이해할 수 없던 부모님의 행동을 나이 들어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새 편하고 좋아질 때.
예전엔 어른들이 비싼 옷보다 편한 옷을 찾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멋도 중요하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안다. 하루 종일 불편한 옷을 입고 있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그렇게 바뀐다. 20대에는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다. 옳고 그름이 분명했고, 내 기준이 정답이었다. 30대가 되니 회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40대가 되고 나서는? 무지개색이다.
모든 입장과 상황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이를 '탈중심화'라고 불렀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 하지만 진정한 이해는 책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그 나이가 되고, 그 상황에 처해봐야 온다.
얼마 전 친구와 뷔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옆 테이블 할머니께서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 오셨다. 새우튀김 위에 잡채가 올라가고, 그 위에 또 샐러드가 쌓여 있었다. 같이 간 친구가 작게 혀를 찼다.
"저렇게 먹으면 맛이 있나..."
나는 친구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나중에 저럴 거야. 다리 아프면 한 번에 다 가져오고 싶을 거야."
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최선인 것이 누군가에겐 최악일 수 있다.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데일 카네기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성공뿐 아니라 성숙의 핵심이기도 하다고.
그래서 요즘은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왜 저럴까' 싶을 때, '나도 저럴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바꿔본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언젠가 나도 뷔페에서 한 접시에 모든 음식을 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젊은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면, 그저 미소 지으리라.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마음껏 여러 번 왔다 갔다 해라.'
세상은 내가 서 있는 곳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적어도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