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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Jul 14. 2022

왜, 마트에서 바닥에 드러누울까?

내 아이는 지금 충분한가?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필요를 요구한다. 그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을 통해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채워주는 일련의 것들이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채워짐을 통해서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일부러 필요를 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모도 있기 마련이다. 모유를 주는 엄마가 더 사랑을 하는 것이고 아이의 정서에 그것이 제일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엄마는 아주 비싼 최고급 분유를 주는 것이 아이 사랑의 극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만 원짜리 분유와 10만 원짜리 분유라는 가격차이에서 자녀를 향한 사랑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 아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 아이가 달라질 수 있다면 정말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닐까?  


 반대로 아이가 필요를 채우면서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한다면 뭔가 주는 것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있을까? 분명하게 있다. 아이의 존재와 행동으로 부모가 피드백을 줄 때이다.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존재에 대해서 기쁨을 표현하고 사랑의 언어와 행동들을 표현한다. 아이는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존재가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분명히 부모들은 그랬다. 아이가 맘마를 잘 먹어도 잘했다고 칭찬하고 좋아한다. 잠자고 있으면 자는 모습이 이쁘다고 칭찬하고 좋아한다. 중간에 표정이 바뀌어도 소리 지르며 좋아한다. 심지어 똥을 싸도 잘 쌌다고 칭찬하고 좋아한다. 자기 자신의 표정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아는 셈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뭔가 잘하지 못하고 부모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잘 가지 않는 것 때문에 아이가 좀 덜 이뻐 보인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모습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기 바란다. 


 어쨌든, 어떤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서로 주고받아야 사랑은 완성된다. 내가 사랑을 해줘서 아이가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만큼 키워줘서 그렇게 컸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내가 받은 것도 분명하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만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을 받은 셈이다. 손짓, 발짓, 눈빛만으로도 감격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증거다. 흔하게 이런 말을 한다. 밥을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표현이다. 누군가의 모습으로 내가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필요를 채우는 것을 통한 사랑을 받은 아이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그 사랑을 확인한다. 그래서 맛있는 간식을 주면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을 뺏기면 사랑도 뺏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욕구를 채우는 것이 만족함의 가장 큰 핵심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똑같은 아이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아이가 필요에 대한 공급, 엄밀히 말해서 생존에 필요한 공급을 해 주는 것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대로 받을 줄만 안다. 자신의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며, 자신의 것이 손에서나 눈에서 사라지면 분노하고 소리 지른다.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장난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마트에서 드러눕고 소리 지른다. 왜냐하면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럴 때마다 필요를 얻었던 경험 덕분이다. 부모도 그렇게 필요를 채워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갖고 싶은 것은 모든 아이들의 욕구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것을 갖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 욕구를 어렵지 않게 넘어선다. 왜 그럴까? 자신이 충분하게 사랑받고 있고, 자신의 존재만으로 사랑을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면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결핍의 반대말은 채움이 아니라 충분함이다. 채울 것이 더 이상 없어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충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것이 바로 충분함이다. 


 충분함에 대한 것은 비단 어떤 물질적인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장난감을 원해서 떼를 쓰는 아이가 과연 장난감을 사주면 그것들이 개선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고 성인처럼 어떤 과제나 미션을 잘 수행하지 못했을 때, 그것도 못하느냐면서 핀잔을 주면 그것이 결핍이 된다. 그런 것도 못하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훈련해주는 교사나 코치를 붙일 수도 있다. 그것은 충분함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아이는 어떤 미션을 달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성과를 내어야만 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건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렇다. 인간은 어떤 성과를 이루어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실수를 하고 미션을 실패할 때 필요한 자세는 “괜찮아”다.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뭐.”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어떻게 하는가? 흘리고 먹는다고 핀잔을 준다. “괜찮아, 닦으면 되지. 치우면 되지. 맛있게 먹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충분한 것이다. 흘리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흘리더라도 치우는 것을 알면 그만이다. 그 어느 날에는 그냥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도 표현해본다. “OO아, 아빠를 사랑해줘서 너무 고마워.” 내가 널 사랑한다는 표현도 좋지만, 그렇게 사랑을 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까.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은 장난감도 맛있는 간식도 아니다. 바로 당신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는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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