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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Jul 30. 2022

운명 같은 사랑이어도 권태기는 온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당신을 만난 건 운명이에요  


 이성을 향한 고백으로 제법 많이 쓰는 문장이다. 말 그대로 서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으로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확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말하면서 나중에 싫증이 나든 싸우든 어떤 문제가 생겨서 헤어진다. 과연 입에 담았던 '운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냥 호감이 생겼을 때부터 헤어지기 전까지의 딱 그 시간만을 위한 운명이었던 것일까?

 운명의 한문 뜻을 살펴봤다. 운명(運命) '운'은 '옮기다'라는 뜻이다. 신기하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한문의 뜻은 옮긴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더구나 그 뒤에 따라붙은 '명'이라는 글자는 '목숨'이라는 뜻이다. 내 목숨과 생명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내 맘대로 안되어서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초자연적이고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뜻일 듯싶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른 모든 인류의 목숨은 그렇다 치자. 내 목숨이 아닐 바에는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목숨이라야 중요한 것이다. 일단 다른 모든 인류를 제쳐두고 나만 생각해보자.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건데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내가 정말 죽고 싶어서 건물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도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죽지 않을까? 독약을 먹는다고 죽지 않을까? 칼로 손목을 긋거나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도 죽지 않을까? 그 위대하고 내 생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다면 말이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 걸려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내 운명이 그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어서 병이 낫는다던지, 아니면 병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어서 시한부 질병으로 죽기 바로 전날에 교통사고로 죽게 될까? 정말 말장난 같은, 소설 같은, 터무니없는, 영화 같은 이야기다.  

 내 삶은 그냥 내가 살아온 대로 흘러가는 거다. 내가 지금의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랐고, 정확하게 내 부모와 그 선조로 이어지는 유전자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어떤 특정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내가 전형적인 삶으로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바꾸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객관적인 차원으로 어떤 삶의 성과를 보여주고, 어떤 업적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성패와 상관없이 내 삶은 내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내 삶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유전이나 운명이나 그런 것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의 삶의 모든 구성들로 내 삶이 이루어진다. 그게 어떤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먹는 음식의 영양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운명일까? 그렇지 않다. 그저 내 부모의 유전자와 생물학적인 결합의 탄생으로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그걸로 끝일까? 그냥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야 할까?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것도 바꿀 수 있다. 이민을 가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고, 미국 시민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내가 그렇게 선택해서 도전해서 노력하면 가능한 영역이다. 운명의 일이 아닐 뿐이다. 내가 고기 먹는 것을 거부하고 비건으로 살아간다면 내 외모와 체질과 내 건강 상태는 또 달라질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을 거부하고 포기하면 굶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팔자는 왜 이럴까?"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봐."라는 말은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다. 유행어처럼 회자되었던 말도 있었다. "이. 생. 망" "이번 생은 망했다." "이번 생은 틀렸나 봐."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의 삶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건 스스로 자신의 삶이 그렇다고 결정한 것이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싫은 것이 있다면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권리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고 사수하려고 하고, 쟁취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열정을 내면서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는 내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그러니 다른 핑계를 대지 말자. 전혀 영향을 끼치지도 못하는 운명을 끌어다가 내 삶이 별로인 것으로 핑계 삼지 말고, 조금은 아쉬운 환경 때문이라고 핑계 삼지도 말자. 심지어 부모 잘못 만났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하지 말고, 나는 하기 싫었는데 부모님이 원해서 했다는 변명도 하지 말자. 분명하게 내가 모두 할 수 있는 영역이고, 반대로 내가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던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환경이든 운명이든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이든, 그 모든 것보다 내 삶에 대한 결정권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제일 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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