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은 내가 는 것이다
"당신을 만난 건 운명이에요."
이성을 향한 고백으로 제법 많이 쓰는 문장이다. 서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으로, 사랑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운명 같은 만남이라던 사람들이 나중엔 싸우고 헤어진다. 그렇다면 '운명'은 대체 뭐란 말인가? 호감이 생겼을 때부터 헤어지기 전까지만 유효한 한시적 운명이었나?
흥미롭게도 운명(運命)의 한자를 뜯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운(運)'은 '옮기다, 움직이다'는 뜻이다. 운명이 정해진 것,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뜻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명(命)'은 목숨을 뜻한다. 즉, 운명은 '목숨을 움직이는 것'이다.
심리학자 줄리안 로터(Julian Rotter)는 '통제의 위치(Locus of Control)'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내적 통제 위치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외적 통제 위치를 가진 사람은 운명이나 타인, 환경이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연구 결과, 내적 통제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 더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산다.
정말 운명이라는 초자연적 힘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면, 자살을 시도해도 '죽을 운명'이 아니면 살아날까? 시한부 판정을 받아도 '그런 운명'이 아니면 기적적으로 회복될까? 아니면 병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어서 죽기 전날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날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사회심리학자 대릴 벰(Daryl Bem)의 자기지각이론(Self-Perception Theory)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나는 이런 운명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운명'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한다.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건 운명이 아니다. 부모의 생물학적 결합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원한다면 이민을 가서 다른 나라 시민이 될 수도 있다. 육식을 거부하고 비건이 될 수도 있다. 회사원으로 살다가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
행동경제학자 댄 길버트(Dan Gilbert)는
"우리는 미래가 과거의 연장선이라고 착각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라.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앞으로 10년 후의 나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다.
"내 팔자는 왜 이럴까?"
"이번 생은 망했어."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봐."
이런 말들은 사실 자기 합리화다. 변화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운명)이 없다.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신경과학 연구는 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뇌는 평생 변화할 수 있다(신경가소성). 새로운 습관은 21일이면 형성되고, 66일이면 자동화된다. 운명이 아니라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심리치료사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면, 싫어하는 것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
부모가 원해서 했다는 변명도, 환경 탓도, 운명 탓도 모두 핑계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말처럼,
"내 운명을 지배하는 것은 별이 아니다.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고, 내 운명의 주인이다."
운명 같은 사랑도 노력 없이는 권태기가 온다.
운명 같은 재능도 갈고닦지 않으면 녹슨다.
운명 같은 기회도 준비되지 않으면 놓친다.
결국 운명은 없다. 있다면 오직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운명뿐이다.
그리고 그 펜을 쥔 사람은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