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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Aug 02. 2022

진짜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반쯤 담긴 컵의 물을 보고..

 말 그대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지금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비를 멈추게 하거나 곧장 해가 뜨게 할 수는 없다. 아침인데 일하기 싫다고 곧바로 저녁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런 당연한 것에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할 것이다. 어쩌면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심각하게 하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한마디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내가 말기암에 걸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 또한 어떻게 할 수 없다.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바꿀 수 없다. 설령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도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누구나 거부하고 싶지만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첫 부분에 얘기한 자연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비관하거나 다른 분풀이를 찾거나,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지 찾는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말기암에 걸렸을 때,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살 텐가? 그동안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당신 때문에 말기암에 걸렸다고 저주하면서 삶을 마감할 건가? 그 정도로 추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날릴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럴 때에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더 바라보고 사랑의 표현을 해주고, 언젠가는 죽는 인생이지만, 내가 조금 더 빨리 갈 뿐이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남은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또한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옆에서 아무리 그렇게 하라고 해봤자.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괴로운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의 격'이든 '삶의 격'이 되었든 그 차이는 바로 괴로운 지점에서 결정된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으로 표현을 했지만, 평소의 삶에서 부정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어떻게 그 상황을 대해야 하는지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지듯이, 일상의 삶을 그렇게 살아낸 사람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도 그 격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교통체증이 심한 구간에 진입했을 때에도 그 상황을 지혜롭게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말기암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교통체증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동차들을 향해서 원망을 하든 욕을 하든,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정부를 욕하든, 도로가 넓지 않다고 도로를 욕하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교통체증이든, 내 주변의 다른 자동차든, 정부든, 바닥에 깔린 도로든,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말기암에 관심이 지극하지만 정작 말기암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교통체증의 상황에서도 배울 것과 나에게 좋은 것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긍정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정신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주는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는 시간이 교통체증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그 속에 매몰되지 말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긍정을 찾는 것이 진짜 힘이다. 정말 누구나 알고 있는 좋은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반쯤 담긴 컵의 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반이나 남아 있네’라고 여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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