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겪지 않고 어떤 변화를 얻어낼 수 없어
중딩 딸과 대화를 나누었다. 중딩과 대화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난 괜찮은 어른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딸이 아닌 다른 중딩은 나와 대화가 불가능하니깐. 어쩌면 딸이 착한 건지도 모른다. 아빠와 대화라는 것을 해주니깐 말이다. 아직 중1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년이나 그다음, 아마도 수 년내에 대화가 단절될지도 모른다.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어쨌든 깊이 있는 고민상담이나 진로상담, 연애상담 그런 주제는 아니었다. 그냥 아주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화였다. 그날의 주제는 성평등이었을까?
딸은 학교에서 농구 동아리에 들어갔다. 운동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딸아이에게는 꽤 자연스러운 동아리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날 대화를 꺼냈던 내용은 바로 농구 동아리에서 생긴 불만이었다. 팀을 남자팀과 여자팀으로 나눈 것이 문제가 되었다.
"농구반 선생님은 왜 남자와 여자로 팀을 나누는지 모르겠어."
난 그 투덜거리면서 하는 말에 물어봤다.
"그게 왜? 남녀 차별 같아서?"
"아니, 남녀 차별이라는 생각은 아닌데, 그렇게 나누면 재미가 없어."
그럴 만도 했다. 중학교 1학년의 아이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대부분 더 크다. 물론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큰 아이들이 있고 근력이 더 좋겠지만 평균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훨씬 더 크다. 더구나 다른 종목도 아니고 농구는 키가 크게 영향을 끼치니까. 그 생각이 끝날 무렵에 아이가 말한다.
"남자 애들이 키도 작고, 그러니까 재미가 없잖아."
충분하게 동의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딸 입장에서는 그런 차원으로 팀을 나누는 것은 농구라는 스포츠를 하는 데 있어서 맞지 않다고 생각되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당연한 조언이었다. 이 일로 학부모가 이의제기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설령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간 딸아이에게 한소리 들을 게 뻔하다.
"싫어. 그러다 찍히면 어떡해?"
"뭘 그런 걸로 찍히기 까지? 그런 걸로 찍히지 않아."
"그래도 그러면 어떡해. 좀 그렇잖아."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좀 불편했나 보다. 하기사 그동안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이사 오면서 들어간 중학교라서 어렸을 적부터 아는 친구들이 하나도 없는 데, 그런 일로 나서면 좋지 않게 볼 것이 뻔하다. 물론 그런 것을 감안하고 할 만한 일이라면 해야겠지만. 그래도 그 일을 해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선택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생각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해줬다.
"갈등을 피하면서 뭔가를 얻을 수 없어. 갈등을 겪지 않고 어떤 변화를 얻어낼 수 없어."
딸이 약간 의외라는 듯 반응한다.
"오~ 그런 명언은 어디서 찾은 거야?"
"여기서 말하는 갈등은 싸움이나 다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그냥 마음속의 어려움이라도 갈등이니까. 그걸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방향성은 찾을 수 있다. 갈등이라는 단어 자체로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온다는 것은 어떤 변화가 가능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갈등이 있으면 행동을 요구한다. 갈등을 피하든 극복하든 그 갈등에 순응하든 말이다.
일제 강점시대에 3.1 운동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광주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그런 위대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환경을 향한 반발과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시대가 오지 않았나? 딸아이와의 대화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도약해서 사뭇 민망스럽긴 하지만, 삶의 순간에서 종종 벌어지는 갈등의 상황을 두렵거나 불편하거나 인상 쓰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일부러 갈등을 유발해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등을 통해서 삶의 마이너스를 겪는다면, 당신은 예외로 갈등을 플러스로 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