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존중받을 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고정관념은 참으로 무섭다.
왼손잡이 친구가 밥을 먹는 모습조차 어색하게 만든다.
남자가 핑크색 옷을 입으면 이상하게 쳐다본다.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하고, 남자는 짧아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
파란색은 남자, 빨간색은 여자라는 구분.
어렸을 때 합창단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남자아이가 합창단에? 그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있는 남자 단원 한두 명도 편견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렇다면 고정관념의 반대는 뭘까?
혁신? 개혁? 일부러 반대로 하는 것?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형형색색으로 염색도 해봤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멋진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이상한 사람'이 되었을 뿐.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는 편견 연구의 대가다.
그는 "편견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갖는 적대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접촉'이 아니라 '이해'라고 했다.
고정관념의 진짜 반대말은 '존중'이다.
사전적으로 존중의 반대는 '무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고정관념도 일종의 무시다.
상대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고, 관습과 다르면 잘못된 것으로 여기니까.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라고 했다.
상대를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존중의 시작이다.
존중은 양방향이다.
고정관념적 사고도 인정하고, 그 반대도 인정한다.
머리 긴 남자도, 짧은 머리 여자도 모두 괜찮다.
내성적인 사람이 조용한 것도, 가끔 시끄러운 것도 자연스럽다.
외향적인 사람이 활발한 것도, 때론 조용히 있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가장 흔한 우리의 반응: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저런 행동은 잘못된 거 아니야?"
내 기준과 다를 때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물론 명확한 선은 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은 존중할 수 없다.
그건 고정관념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름'은 그저 다를 뿐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사회적 실재는 구성된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사실은 만들어진 관념이다.
조선시대엔 양반제도가 당연했지만, 지금은 미개한 신분제로 본다.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Muzafer Sherif)의 '로버스 동굴 실험'은 충격적이다.
아무 이유 없이 나눈 두 집단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자 편견이 사라졌다.
존중은 어렵다.
나와 맞지 않아도 해야 한다.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도, 학력이 낮은 사람에게도, 다른 문화권 사람에게도 해야 한다.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진정한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고, 배우는 사람도 가르친다"라고 했다.
존중할 때 비로소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존중은 존중받을 만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내가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만 존중한다면, 그건 존중이 아니라 동조일 뿐이다.
동의할 수 없어도 상대의 존재와 선택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존중이다.
작가 로맹 롤랑은 말했다.
"편견을 버리는 것보다 원자를 분열시키는 것이 더 쉽다."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가치 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반항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오늘 누군가의 '다름'을 마주했을 때, 잠시 멈춰보자.
'저건 아닌데' 대신 '저럴 수도 있지'라고.
그 작은 전환이 세상을 넓힌다. 존중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