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미를 재정의 해야 한다
상처를 받는다고??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누군가 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보통 "상처받았어."라는 표현을 한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 입장을 바꿔서 표현하면 이런 의미인 거다.
"네가 나한테 상처를 줬어."
그 어느 누구도
"내 마음속에 상처가 생겨서 나는 지금 기분 나쁘고 별로야."
"마음속에서 상처가 느껴지기 위해서 나 스스로 애쓰고 있어."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것은 그저 100% 자기 자신의 영역이다. 원인제공을 한 어떤 사건이나 말이나 어떤 사람이 존재하긴 하지만 감정 그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인이 되는 사람이 나에게 뭔가를 건넨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건네지도 않았는데 내가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 현상과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분명하게 마음의 생채기는 관계에서 온다. 무인도에 나 혼자 살면서는 생기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보통 자기 자신을 돌아볼 정도의 마음가짐이라면 스스로 상처가 생겼다고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마음의 생채기는 관계에서 오고, 실제 어떤 관계가 있지 않더라도 상상 속의 관계 때문에도 생채기가 생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같은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보통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가장 먼저는 상대방의 표현에 대해서 내가 불편할 때이다. 상대방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불편한 경우가 있다. 또 상대방의 의도와 다르게 내 차원에서 불편한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럴 때 상처를 받았다고 표현하고 또 그렇게 여긴다.
또 다른 경우는 내 표현에 대해서 상대방이 불편할 때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내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그러는 경우다. 우리는 이럴 때 상처를 주었다고 표현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준거야?"
"내 말이 기분이 나빴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정말 의도적으로 그러는 경우도 있다. 일부러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하고,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하거나 화가 나거나 속상해할 만한 말들을 일부러 하는 경우다. 생각보다 이런 경험도 우리는 많이 한다.
정말 우리는 상처를 받는 것일까? 상대방이 나에게 주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받는 것일까? 상대방은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내가 받는 것이라는 개념은 일단 앞뒤가 부정확하다. 심지어 주고받는 상태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아니다. 상처라는 무형의 에너지가 상대방에게서 뿜어져 나와서 나에게 전이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뭘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안에서 생기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에 기분이 나빠서 내 안에서 불편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 내가 없애면 된다. 아니, 받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미를 재정의 해야 한다.
부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불교 경전인 <빠알리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있을 때 힌두교의 브라만 사람 '악꼬사까'가 자기 가문의 사람이 부처에게 출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서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욕을 듣고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집에 친구나 동료들이 방문하러 오는가?"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부처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들에게 다과나 음식을 대접하는가?"
어떤 때는 다과나 음식을 대접한다고 대답하자 부처는 다시 또 물었다.
"만일 그들이 그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인가?"
'악꼬사까'가 그에 대해 대답하였다.
"대접했는데 그들이 음식을 받지 않으면 내 것이지."
그 말에 부처는 '악꼬사까'에게 말했다.
"당신이 준 욕을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 욕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상처를 주는 것은 또 어떨까?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과 상황으로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마음을 닫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의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용기"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일로 돌아선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것이라면 정확한 의도를 전달하자. 그렇게 정확한 의도를 전달해도 상대방이 여전히 상처를 받았다는 표현과 행동을 한다면 그때부터의 상처의 몫은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지키고 통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켜주는 건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고 통제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 하는 것이 맞고 당연한 거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흘려보내는 것이 좋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의 의도와 표현들 때문에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지 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한 가치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존감은 그냥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존감의 발현은 나 자신에 대한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수많은 외부의 공격이 있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나 자신의 가치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심리 사회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이것을 가리켜 "회복탄력성"이라고 표현했다.
나의 회복탄력성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