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 안 듣는 어린아이 하나를 품고 사는 거다
상처라는 녀석은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내 생각과 몸은 성장하지만, 상처는 그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마치 원하는 걸 얻으려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아이처럼.
아무리 달래도, 설명해도 일어서지 않는다.
상처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 녀석은 성장을 멈춘다.
그렇게 말 더럽게 안 듣는 어린아이 하나를 품고 사는 거다.
때론 어린아이가 아니라 고집불통 어른일 수도 있다. 그 어른 역시 더 이상 나이 먹지 않는다.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이를 '거짓 자기(False Self)'라고 불렀다.
상처받은 순간의 자기가 내면에 갇혀 성장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치유가 가능할까?
엄밀히 말하면, 상처는 치유할 대상이 아니다.
왜? 상처도 나 자신이니까.
나와 상처를 분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치유한단 말인가?
손을 칼에 베었다고 생각해 보자.
상처 난 손을 부끄러워하는가? 손목을 잘라 버리는가?
아니다. 끝까지 치료하고 보살핀다. 흉터가 남아도 여전히 내 손이다. 못 쓰게 되어도 내 손이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왜 다를까? 왜 수치스럽게 여기고 숨기려 할까?
트라우마 연구의 권위자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는 "몸은 기억한다"라고 했다.
상처는 머리로만 있는 게 아니라 온몸에 새겨진다. 그래서 없앨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다르게 산다.
누군가는 상처를 딛고 빛나게 살고, 누군가는 상처에 갇혀 자신이나 남을 해친다.
차이는 뭘까? 상처의 크기가 아니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다.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Marsha Linehan)은 변증법적 행동치료(DBT)를 개발하며 말했다.
"고통을 피하려 하면 고통이 더 커진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자유가 온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버린 부모의 문제지,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연인에게 차였다? 안 맞아서다. 내 존재가 문제인 게 아니다.
이혼했다? 그럴 수 있다. 내 삶이 망한 증거는 아니다.
작가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썼다.
"상처가 있는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일본에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는 개념이 있다.
사물의 슬픔, 즉 모든 존재가 품고 있는 근원적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미학이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 성장하지 않는, 나이 먹지 않는 상처들.
정신과 의사 칼 융은 "신경증은 피하려던 정당한 고통의 대체물"이라고 했다.
상처를 피하려 할수록 더 큰 고통이 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안고 산다. 품고 산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서로 지적할 필요도 없다. 다들 하나씩, 둘씩 안고 사는 거다.
내가 더 힘들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 내가 덜 아프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
엄지가 베인 것과 새끼손가락이 베인 것 중 뭐가 더 아픈가? 그냥 다 아프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의 '자기 연민(Self-Compassion)'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상처를 친구의 상처 대하듯 따뜻하게 대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고.
상처가 괜찮아지는 건 언제부터일까?
'이렇게 안고 살아가겠다'라고 받아들인 순간부터다.
오늘도 당신은 말 안 듣는 상처를 품고 산다.
때론 떼쓰고, 울고, 소리 지를 것이다.
괜찮다. 그것도 당신이다. 그것까지 사랑하는 게 삶이다.
상처는 나이 먹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품은 당신은 매일 성장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