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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Oct 30. 2022

깍지 낀 손

2020년 8월 6일 : 글쓰기 37일 차,


수술 후 자꾸 걸어야 회복이 빠르다는 교수님의 채근에 51번 병동 복도를 힘겹게 걷던 엄마. 그런 엄마를 부축하며, 느림보 걸음을 걷는데 갑자기 깍지를 껴오는 엄마 손길이 무척이나 어색하다. 그 마음을 왠지 기록해 두고 싶어 적어놓은 글이다.




간질간질 설레는 깍지 낀 손, 첫사랑과 손깍지 끼던 첫날은 아직도 말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연애가 시작될 때 손깍지 끼던 그 설렘을 잊고 싶지 않아 써 두었던 일기는 지금도 읽어도 너무 귀엽다. 우리 사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알려주는 세상 로맨틱한 신호, 깍지 낀 손.


아빠와 하루 씩 번갈아가며 병실서 밤을 지낸 게 어느덧 스무날이 넘어간다. 오늘은 엄마 주변이 가볍다. 손목에 두세 개씩 꼽고 있던 바늘은 빠지고 어지럽게 꼬여있던 호스 줄은 모두 사라졌다. 미음으로 끼니를 시작했던 날이 지나 죽도 드신다. 이것만으로도 훨씬 가뿐하고 기쁘다. 창가 옆에 누워 계신 엄마는 스무날 철철철 지겹게 내리던 비와 까만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궂은날 때문에 컨디션이 더 무겁다며 애꿎은 날씨만 탓하셨다. 몇 날 며칠을 비가 개면 좀 나아질 텐데 하셨다. 드디어 비가 좀 개인 하늘에 가끔씩 해가 보인다. 엄마의 가녀린 손목이 딱 개인 하늘만큼 밝다.


산책 중 저 멀리 유리문에 비친 쑥 들어간 눈과 더 깊어진 엄마 얼굴이 이젠 한 주먹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아,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수술 후 링거 거치대에 몸을 의지하며 한 발씩 겨우 내딛던 모습을 떠올리면 쑥 꺼진 엄마 볼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퉁" 심장이 떨어지듯 보드랍고 말캉한 엄마손이 사이사이 내 손으로 깍지 끼며 들어왔다. 어쩜... 이리도 낯설까.


어색하게 끼어진 손깍지를 뺄 수도 없고, 그저 멋쩍은 걸음만 걷는다. 뱃심이 없어 구부정한 허리에 앙상한 손이라 왜인지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색해도 이렇게 엄마랑 손깍지 끼고 걷는 병원 산책길이 감사하다. 모녀지간 사적 거리 유지하고 산 세월이 얼마인데 아프니까 우리 사이 찰싹 붙어 다정한 모녀 흉내도 내어본다며, 좋아하는 남자랑만 껴 본 손깍지 엄마랑 끼니 참으로 어색하고 좋다며 농담하고 웃어도 본다.


첫사랑 설레는 깍지 낀 손이 엄마에게 닿아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일정 거리 유지하던 모녀 사이 너무 정다워지면, 영국으로 다시 가는 날 철철철 얼마나 울려고 그러는지 쓸데없는 염려도 해본다. 그래도 오늘은 혹시나 싶어 들고 온 노트북 켜고 책 읽는 엄마 곁에서 글도 끄적일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며 그런 염려는 접어둔다. 첫 항암이 생각난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던 꽉 감은 엄마의 눈이 생각난다. 세상 참 깜깜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어둡던 날이 조금은 개인다. 이 시간이 모두 지나니 엄마와도 추억할 수 있게 된 세상 로맨틱한 신호 깍지 낀 손, 이젠 안심해도 되는구나 안도의 신호로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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