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일 : 글쓰기 34일 차,
<인간이라는 직업>이라는 책을 부여잡고, 당시 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던 시기의 기록이다. 지금 돌아보이켜 보면, 병간호로 힘든데, 매일 글 쓰려 애쓰던 모습이 안타깝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진다. 그 시간을 견뎠기에 글 쓰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이대로 성장이 가능할까? 글쓰기 백일을 버티다 보면 무엇이라도 반드시 성장해 있겠지, 이런 맘으로 매일을 발버둥 중이다. 한데 의심증이 인다. 과연 이렇게 아무거나 마구 써댄다고 성장할 수 있을까? 매일 부딪히는 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괜한 소모는 아닐까? 어차피 쓰는 것 좀 더 곰삭은 생각을 골라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증에 질문이 또 꼬리를 문다.
암과 싸우고 있는 가족의 피곤한 눈빛을 보며 고난이 오면 성장한다는데 지금 이 고난은 무엇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할 것인가? 성장이란 것이 고통을 이겨낸다고 반드시 돌아오는 것일까? 이 고통은 과연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퍼붓는 소나기처럼 물음표가 사정없이 머릿속을 내리꽂는다.
- 한 남자, 책 <인간이라는 직업> 그리고 암
며칠 전부터 한 남자를 만나고 있다. 스위스에서 온 알렉상드로 졸리앵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직업'을 잘 살아낸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삶의 시작을 소화 마비라는 고통으로 맞이해야 했던 이 남자는 그의 고통에 대한 숙고를 이야기로 엮었다. 그 속에서 나는 질문답의 대화를 통해 쏟아지던 물음표 중 무엇이라도 해결해보려는 기대감과 함께 그를 만나는 중이다.
엄마의 암이 일상을 침범한 것을 알았을 때 가족 모두 수술, 치료, 항암 그리고 그 후 관리에만 온갖 신경을 쏟고 있었다. 선 항암 3차, 열 시간의 수술, 그리고 남은 3차 항암 이 무서운 과정을 신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고민뿐이었다. 삐들삐들 앙상한 몸, 수술이 남긴 기다란 흉터 자국, 까부라지는 눈동자가 마주할 상대는 암덩이 그 자체라기보다 이것이 불러온 신체적 고통에 흔들려 버린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미세하게 시작된 일상의 균열이라는 것을 이제야 모두 눈치채기 시작했다.
- 사는 건 전투다
알렉상드로는 탯줄이 목에 감겨 질식사 직전에 태어나 소화 마비라는 장애를 안고 살게 된다. 어릴 적 부모와 떨어져 요양 시설에서 17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실존은 투쟁이었다고 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몸의 불필요한 움직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내리 눌리는 자아와의 끝없는 투쟁으로 인간이라는 직업을 수행 중인 그가 이렇게 말한다.
“전투다! 나는 삶에서 이득을 얻어내고,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안 그러면 망한다."
병이 삶을 파고들 때 그것이 위험인 이유는 일상을 곧바로 세울 수 없는 마음의 교란 때문이다. 일상에 생긴 아주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정신적 부담과 그 무게는 모든 것이 제자리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강도로 몸과 마음을 내리누른다. 사소한 균열이 쉽게 불안과 두려움으로 돌변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이든 가볍게 받아들이려 노력해야만 한다.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알렉상드로는 혼란에서 시작된 삶에 균형을 잡아넣기 위한 전투를 했다면, 나는 무너진 균형이 남긴 혼란 속에 새로운 형태의 균형을 잡아넣는 전투를 시작해야 한다.
- 체념, 가장 큰 두려움
전투 중에 가장 크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체념이라고 한다. 이 체념이 불러온 절망 앞에 희망하기를 멈추는 것이야 말로 어이없는 패배로 전투를 마감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암이 뒤집어 놓은 일상에 가장 두려운 것 또한 체념이다. 죽음으로 몰렸을 때 의지를 놓아버리고 그 상황에 정신을 맞겨버리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체념에 빠지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 그것을 통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상황을 역전하고 성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는 아닐까. "더없이 무의미한 순간도 이리하여 스스로 강화할 기회가 된다." 체념의 두려움을 이기고 고통의 상황 속에도 끊임없이 나아가기를 선택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곧고 균형 있는 마음의 상태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 성장이 시작되는 과정
결핍을 채우려는 의지야말로 행복의 결과로 향하기 위한 최고의 도약대가 된다. 알렉상드로는 참을 수 없는 불안정으로 몸 어느 한구석 통제 없이 이상하게 움직여대는 일 분 일초와 다툰다. 그에게 결핍은 균형이다. 그는 균형을 찾아 철학에 이르러 몸의 불균형을 정신의 균형으로 이겨냄으로 삶의 희망과 기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알렉상드로는 결핍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받아들여 철학에 이르렀다.
"인격을 형성하고 성장하려는 자, 아무것도 숨기지 마라. 숨기려는 행위에 급급하다 보면 이 상황이 주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전이 받아들이고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결핍과 부족함으로 가득한 내가 여기 서 있다. 이제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간다!"
암의 존재를 어찌할 수 없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 아니다 두렵다. 자칫 잘못될까 노심초사한 마음 가득이다. 깊이 들어선 두려움을 숨기느라 급급했던 불안했던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시원타. 쓰는 게 딱 이 수준이다. 여기 너무도 부족한 내가 부서진 문장만 주야장천 써재끼고 있다. 아, 받아들이고 나니 더 시원타. 그래 불확실하고 모자라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알렉상드로와 함께 전투의 길로 함께 나서고자 하는 결심의 이유다.
- 고통이 성장하게 한다
엄마는 한없이 약해지셨다. 장시간 누워있던 수술대 위에서 많은 장기들이 떼어져 나갔고, 커다란 수술 자국은 선명히 남겨졌다. 아직도 그 수술 자국과 마주하지 못하는 엄마는 신체가 겪고 있는 고통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을 부둥켜안은 정신의 고통이 더 큰 것 같다. 그렇다고 엄마가 상실의 고통을 통해 어떤 성장을 하실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엄마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혹시나 체념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매일 노심초사 염려하는 딸은 또 어떠한가. 그 염려의 고통은 어떤 성장의 결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비극적인 것이 우리를 가르친다. 비극적인 것을 늘 가까이하는 사람은 성장한다. 괴로움, 좌절, 고통에 의해 풍성해지고 나날이 극복하는 장애에서 자양분을 얻는 지혜는 아마도 얼마간 쓸모가 있을 터이다. 물론 귀는 쫑긋 곤두서야 하고, 의지는 다져야 한다.”
조건이 붙었다. 고통을 통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꼿꼿이 세운 감각을 통해 끊임없이 극복하고 배워가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의지만이 성장을 돕는다.
- 언제 성장하는가
성장 또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알렉상드로처럼 장애로부터 시작된 고통을 전투로 선택하느냐, 병마가 덮친 환경 속에서 체념으로 잠식되느냐 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투쟁으로 삶의 이득과 기쁨을 찾아내기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각자가 가진 "조건의 총체를 감당하기 위해서 실존을 조각해내는 것이다."
고통이 내린 환경에서 전투를 선택했다면, 결핍이 닿아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 결핍을 드러내어 인정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고통의 비극이 내려준 성장의 축복을 오롯이 받아내어 성장하기 위한 모든 감각을 세우려는 의지도 따라와야 한다. 알렉상드로와의 대화 덕에 고통 속 성장을 의심하던 물음표의 소나기가 어느덧 잦아듦을 느낀다.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