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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Nov 11. 2020

너를 추억하는 법

2020년 8월 18일 : 글쓰기 49일 차,


곰삭은 선물이 주는 기쁨을 떠올리며 적어내려갔다. 글을 쓰면서 포근한 행복감을 느꼈다. 미소지으며, 추억할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분의 시간, 걸쭉한 머릿속 맑고 시원하게 쉬고 싶을 때면, 지브리 만화 한 편을 틀어두고 대사를 읇조리며 평안을 즐긴다. 그중 <마녀 배달부 키키>는 내 선택을 가장 많이 받는 만화다.


열 살이 되면, 마녀 수업을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해 본인이 있을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야기가 중심인 이 만화는 방랑벽 가득한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 좋다. 시계탑이 있는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고 싶다며, 바다로 향하던 키키와 언덕 위 바닷바람 잔뜩 맞으며 서 있는 시계탑이 마음에 들어 영국 브라이튼에 처음 독립해 살던 시절의 나, 잘하는 것을 발견해 그 특기로 먹고살아야 하는 마녀 키키가 당면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20대 방랑의 자유를 느끼며 나플나플하던 나에게 닥친 먹고 살 고민.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키키를 보는 시선은 애틋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키키를 만나게 해 준 이 친구 덕분에 그 시선에 애틋함이 더욱 묻어난다. 영국 생활 초창기,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면 더 친절하게 되고, 쉽게 가까워지게 마련인데 이 친구는 항상 새침하고 냉랭한 모습으로 한국 사람들을 대하곤 했다. 한동안 나에게도 이런 태도로 일관하기에 날 싫어하는 줄 알고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마주치는 순간이 잦아지고, 밥 먹는 횟수가 늘어가다 보니 따뜻한 면모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눈치채지 못하게 살뜰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요즘 말로 '츤데레'의 정석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 더 친해지고 이 친구와 둘이 밥 먹고 장 보러 다니다 보니 좀 특별한 구석이 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특별한 장소나 기억하고 싶은 곳을 다녀온 후에 남는 티켓이나 영수증을 모아두는 좀 질척거리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나오면 티켓을 쫙쫙 찢어 휴지통에 냅다 버리는 것이다.


"너무 정 없는 거 아냐?"

"뭐가?"

"아니 같이 영화 보고 좋은 시간 보내고 나왔는데, 그 티켓을 내 앞에서 그리 무정하게 찢어 버리면,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그 시간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걸로 느껴지잖아."

"하하하 별 게 다 문제다. 그런 게 어딨냐? 좋은 시간 보낸 건 내 마음에 남았고,

저건 간직해봤자 쓰레기로 남을 텐데. 어차피 버릴 것 빨리 버리는 게 낫지."

"그래! 넌 참 쿨해서 좋겠다!"


어쩌다 또 나눈 대화에


"넌 보고 싶은 사람 없어?"

"보고 싶은 사람? 생각하면 많지, 근데 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해.

지금 같이 있는 사람한테 충성하는 거야. 그래서 너한테 잘하잖아."

"정 없는 것..."


그때는 저런 말을 하는 친구가 참 정 없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지금이 아닌 추억으로 넘어갈 텐데, 그러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서운함 때문이었다. 말도 행동도 직선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만날 때마다 구운 시디 한 장씩을 매일 건넸다. 거기에는 지브리 만화가 한 편씩 담겨 있었다.


"근데 왜 맨날 지브리 만화만 구워줘? 다른 것도 좀 내놔봐~"

"그래야 지브리 만화 볼 때마다 내 생각할 것 아니야."

"ㅋㅋㅋㅋ 그런 게 어디 있냐?"

"분명 지나고 나면 내 생각날 거야."

"그럴까 과연?"


덕분에 관심도 없던 지브리 만화를 한 편씩 섭렵하며, 당시에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그 친구의 주문에 걸리고 말았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지브리 만화와 연관된 이야기나 음악이 들려오면 그 친구의 얼굴과 음성이 떠오른다. 지나고 보니 그 주문은 꽤나 강력했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리움, 이것의 굴레를 벗어난 삶은 불가능하다. 그 헤어짐을 미리 알아 자신을 지브리 만화와 함께 추억되기를 원했던 그의 천진한 마음이 지금에서야 더욱 고맙게 여겨진다. 선물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기쁨을 줄 수도 있지만, 세월을 입어 곰삭은 기쁨으로 자라나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기를 추억하는 법을 선물할 줄 알았던 그 친구의 멋스러움 또한 이제야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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