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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Oct 30. 2022

이미 지난날들의 말

그럴 때가 있어요. 아무리 다음으로 넘어가려 애를 써도 제자리를 맴도는 듯 답답하고 어지럽기만 한 그런 때 말이에요. 마음속 언저리 넘겨야 할 페이지를 붙잡고 산 지난 몇 년, 어쩌면 이 말 한마디가 필요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이 모든 시작은 인스타를 통해 소통하던 한 인친 분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어요. 2022년 10월 4일, 우리는 런던 체링 크로스 로드에 있는 서점 포일스(Folyes)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낯선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만인지 해가 내리는 시내를 걷는 마음에 낯선 설렘이 가득했답니다. 브런치에 소소하게 소설을 쓰고 있다는 죠리 씨에게 저도 백일 동안 매일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며 지나가듯 말해버렸네요. 그 후로 그녀는 이미 써 놓은 글을 묶어 책으로 내보라는 말을 농담 삼아 몇 번, 진지하게 여러 번 하더군요. 누구나 쓸 수 있는 수준의 글이라는 핑계로 힘들던 날들의 기록을 덮어두고만 있던 세월이 벌써 몇 해째거든요. 점심을 먹고 나와서도,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쌓아둔 글은 어딘가로 꼭 내보내야 한다며 재촉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그 글들을 어디에도 내어 놓을 수가 없어요. 글도 세월을 입으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가요...?"

"네, 꼭 책을 만들어 주세요, 브런치 공모전에 꼭 넣어 보셔야 해요!"


골든 쥬빌리 브리지를 건너 워털루 역으로 가는 길, '이렇게나 내게 강력하게 책을 내보라 말을 건네던 사람이 있었던가? 이 느낌은 뭐지?' 마법사의 주문처럼 공모전이라는 말이 뇌리에 남아 맴돈다. '이건 어쩌면 넘기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페이지를 넘겨버리라는 누군가의 재촉은 아닐까?' 하는 환영에 이끌려 '그래, 그럼 이제 그 페이지를 한 번 넘겨보자!' 하며 커다란 용기를 내어봅니다. 그리고 지난 몇 주간 써 놓은 글을 읽으며, '과거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지난날인데...' 하고 체념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둡던 시절 불행을 마주하고도 회색 구름 사이를 뚫고 떨어지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말을 쏟아내던 그 시절의 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불행 안에는 불행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이제야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지치고, 짜증 나면 친구를 찾아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풀고, 위로받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곤 하지요. 그런데 살다 보니 그럴 수 없는 날들도 있더라고요. 2020년 봄, 코로나로 전 휴직에 들어갔고, 남편도 일자리가 위태로웠으며, 이제 예순을 지나온 엄마가 말기암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전 런던에 살고, 부모님은 서울에 사세요.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아파 오히려 덤덤했습니다. 죽음의 문 앞에 앙상한 나무처럼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저를 지켜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글을 쓰자, 사람들과 함께 뭐라도 쓰면서 나를 살려보자.' 죽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살겠다 발버둥 치는 제 모습이 이상했지만, 뭐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일 글쓰기>에 참여했어요. 제정신을 잡아줄 무언가를 그렇게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백일을 매일 빠짐없이 쓰다 보니 글이 모였습니다. 힘든 날들의 글은 어둡고 무거울 거라 생각했지요. 다 써두고는 한동안 다시 들춰보지 않았어요. 지난날들의 말을 괜히 들춰보면, 다시 그 아픔과 슬픔이 밀려올 것만 같았거든요. 죽음의 두려움 앞에 몸과 마음을 떨던 시절, 매일 써 내려간 글 속에는 이십 대의 여행 이야기 <어디든 떠나보던 시절>,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을 그린 말 <길 위의 별>, 불안전한 오늘이 나를 만든다는 <완벽하지 않은 날>, 엄마라는 존재를 그려본 <날개>, 휴직기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각자의 반짝임>등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쏟아내던 이야기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어요. 


죽음의 공포는 삶이 무너지는 허무함과 어둠의 두려움만을 남기는 듯했습니다. 이미 지난날들의 말을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며,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을 다시 밝히고 있는 저를 만났습니다. '힘들다고 느꼈던 그 시절 우리 가족은 그리고 나는 힘들기만 하지 않았구나, 그 불행 속에서도 웃음과 행복이 있었고, 평소보다 더 큰 감사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구나', 이미 지난날들의 말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제 삶을 밝힐 수 있는 명랑한 밝음이 저에게는 "글을 쓰는 일" 안에 있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 어떤 어려움과 불행이 무겁게 당신을 짓눌러도, 그 곁에는 반드시 당신을 위해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비밀을 말해주는 책을 만들고 싶어 졌어요.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함께 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당신이 외로운 날에도, 물 먹은 스펀지처럼 마음이 묵직한 날에도, 혼자 먹는 밥이 유독 적적한 날에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길 설레는 그 순간에도, 멋스러운 카페에 함께 갈 친구가 없어 적적한 그날에도 부담 없이 집어 들고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도 당신만의 방법을 찾아 삶을 밝게 비출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자고 감히 말하고 싶어요.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어둠 속에 있다해도 나를 다시 일으킬 밝은 길은 당신 안에서 나온다는 걸 함께 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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