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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Oct 30. 2022

길 위의 별

2020년 7월 9일 : 글쓰기 9일 차,


매일 쓰는 일이 아직도 낯설던 시기,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영국행을 마음먹게 된 동기와 낯선 도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던 5편의 연재 글 중 네 번째 글. 이 글은 당시 26살 여자가 영국 생활 중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두 달 좀 안 걸린 것 같아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착한 곳은 영국이에요.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브라이튼이라는 도시죠. 서울에서만 살았던 전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도 살아보고 싶었어요. 결국 바람대로 바닷가 앞 조그만 방을 구했어요. 사실 특별한 계획은 없었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그러려면 언어가 제일 중요해요. 영어 공부를 위한 계획만 세우고 왔네요. 그리고 여행, 길 위의 시간은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제 영어 선생님 엠마는 저와 비슷한 또래였어요. 환경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죠.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윤리적 소비생활, 지역 사회를 지키기 위한 공동체적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니 거의 듣는 입장이었죠. 당시 윤리적 소비 생활이나 공동체란 주제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저는 질문만 드문드문한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죠. 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고 물으니, "환경 문제와 공동체 형성은 우리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거잖아.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 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고 하네요.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제 모습이 너무도 작아지는 순간이었죠. '내가 아니 우리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사는 사람, 관심사의 확장이란 게 이래서 중요하구나.' 라고 배웠어요.


엠마의 학생으로 수업을 받는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인형같이 예쁜 소녀가 있었죠. 이처럼 발랄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일라니아가 교실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밝아지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죠. 그녀의 생기발랄함과 거침없음은 태양빛 같았어요. 눈이 부셨죠. 다른 이에게 나눌 수 있는 밝은 에너지를 가진 저 소녀의 힘이 예쁘고 귀하게 느껴졌어요. 저만의 에너지를 가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라기 시작했죠.


대만에서 온 마르코는 꼭 우리 사촌오빠 같았어요. 아내와 함께 공부하러 온 친구였는데 저와 동갑이었죠. 결혼을 일찍 해서인지 어른 같았어요. 짓궂게 장난도 치긴 했지만 혼자 사는 제게 음식도 싸다 주고, 밥은 잘 먹고 다녀야 한다며 당부의 말도 나눠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죠. 다른 도시로 떠나는 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눌 때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짧은 시간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언어가 달라도 진심은 통하고, 정은 깊어질 수 있구나를 가르쳐 준 소중한 친구이에요. 


이탈리아 친구들은 참 유쾌했죠. 그들에게 심각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 친구들을 아주 가벼운 사람들이라고 보기만 했죠. 그러다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한 주제로 얘기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각자가 가진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내더라고요. 그 어떤 누구보다 심각한 얼굴이었죠. 보이는 게 다가 아니구나를 알아가요.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그때는 대부분 4-5명이 한 방에서 자는 도미토리로만 다닐 때에요. 사람을 만나려면 그게 제일이거든요. 처음으로 남녀 공용 도미토리에서 잠을 자던 그 밤이 생각나네요.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었죠. 잠을 한 숨 못 자겠더라고요. 그런데 하루가 지나니 그 환경에도 적응이 되더랍니다. 적응이 되니 사람들이 보여요. 인사를 나눴죠. 호주에서 온 셰프 스미스 부부는 유럽 미식 여행 중이었고, 독일에서 온 에너지 공부를 하던 수줍음 많던 말테는 머리 식히러 잠시 왔다고 하고요, 브라질에서 법 공부 중이던 마리나는 자기 몸뚱이만 한 배낭을 메고 두 달째 혼자 여행 중이래요. 


우리는 포르토의 작은 숙소에서 만났어요. 각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밤 거실에서 다섯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밤 새 사는 얘기를 나눴어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였지만 이상하게도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사적인 부분까지 서슴없이 나누게 되네요. 마음의 빗장이 쉽게 풀려버리더라고요. 그 후 일정까지 변경하며 리스본으로 함께 여행했죠. 몇 해가 지나고 런던에서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때도 생각나네요. 이렇게 낯선이 와도 친구가 될 수가 있구나를 느꼈던 그 밤이 그립네요.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어요. 숙소를 찾고 있는데 어둑어둑한 늦은 저녁 여행 가방 소음이 마음에 걸렸어요. 돌멩이 구르는 소리까지 들릴만큼 동네가 조용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며 저를 부르는 거예요. 시끄럽다고 불평할 줄 알고 뭐라 대답할지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혹시 길을 잃었냐고요 묻더라고요. 그래서 숙소를 찾고 있다고 했죠.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동네 지도를 가지고 내려왔어요. 그 당시엔 스마트폰이 지금처럼 유용하지 않았거든요. 숙소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고 돌아가려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을 내려오라고 부르네요. 숙소 가는 길까지 산책 삼아 함께 걷고 싶데요. 대학 친구들과 집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고 해요. 제 여행가방 소리가 주변을 맴도는 듯 들려서 내려다보았다고 하더라고요. 조용한 동네에 소음이 짜증이 날만도 했을 텐데 짧은 길을 걷는 내내 친절한 배려를 보여준 이 친구에게 한 수 배웠어요. 


학교도 다녔어요. 런던에서 대학교를 들어갔죠. 계획엔 없었지만, 직업과 상관없는 공부를 해 볼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학교라는 울타리에 다시 들어가니 대학원, 박사 공부하는 사람들까지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셰익스피어, 아프리카, 아시아 문화 이벤트, 미술 졸업 파티, 고고학, 도시 계획 포럼 등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기회가 닿으면 뻔뻔하게 무조건 참석했어요. 저를 스쳐가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제 안에 편견들은 하나씩 버려야만 했던 시간이에요. 편견으로 차 있는 내가 발붙일 곳은 그곳엔 없더라고요. 살아온 배경과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했으니까요. 편견 때문에 놓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아차 싶었어요. 시선이 닿게 되는 모든 것에 편견이 먼저 자리잡지 않도록 끝까지 조심하자는 다짐은 대학 생활 중 얻은 소중한 보물 중 하나예요.


길 위에선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려요. 모든 별은 이야기로 가득 담고 있죠. 그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 제 안에 꽁꽁 싸여 있는 매듭들을 다 풀어헤쳐야 했어요. 별을 만들기 위해선 채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많이 모아 담으려고만 했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모이지가 않았어요. 채워 모으는 것보다 필요 없는 걸 버리는 게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거든요. 버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매듭을 푸는 것도 아픈 일이었죠. 


다른 별들의 이야기를 만나 제대로 듣고, 느끼는 게 마음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확신해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야 내 별을 창조해 낼 힘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니까요. 전 아직도 런던이에요. 그렇게 집을 떠나와 런던에 아주 길게 머무르고 있는 중이에요. 방랑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사람들도 있네요. 


그들이 말하는 집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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