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는 못했지만 닿고는 싶어서

- 마음을 꺼내는 데 걸리는 시간 -

by 월화수 엔 Jane

그날 아침,
부엌 창 너머로 스며든 햇살이
욕실 거울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었다.
익숙한 표정이었지만,
어디에선가 멀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방마다 문이 닫혀 있는 집 안,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고
나는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시간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예전엔 아침마다
출근 준비로 분주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현관 거울 앞에서
“오늘도 잘해보자.”
작게 중얼거리는 습관도 있었다.

그 짧은 말이
하루를 끌고 가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엔
내가 어디 있어야 할지
당연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선택이 맞다고 믿었다.

낮에는 간식 준비와 학원 시간표를 챙기고,
저녁이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시간은 소중했고,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란다.
어느 날은 현관까지 배웅하려는 나를 말리고,
어느 날은 식탁 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 조용한 거리감이
서운했다기보단 낯설었다.
내가 애써 만든 공간에서
내 자리가 조금씩 작아지는 것 같았다.

‘엄마’라는 이름 뒤에
나는 언제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을까.



그날 밤,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뒤
오래 꺼내지 않았던 노트북을 열었다.
하얀 화면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생각나는 말을
몇 줄 적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공허할까.”

한 줄, 두 줄.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묵은 감정을 서서히 꺼내주었다.

불확실함,
무언가에서 밀려나 있는 듯한 기분,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간다는 불안.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이
글자 속에서 조금씩 모양을 갖춰갔다.



며칠 뒤,
대학 시절 함께 글을 쓰던 친구가 떠올랐다.
밤새 시를 읽고,
서툰 고민도 아무 말 없이 들어주던 친구였다.

전화를 할까,
SNS로 톡을 보낼까 고민했지만
그러면 내 마음의 결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말은 금방 흘러가지만,
글은 그 순간의 마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메일을 쓰기로 결심했다.

메일 창을 열고

제목란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요즘 마음이 좀 이상해서…”

‘전송’ 버튼 위에서
잠깐 멈칫했다.
혹시 이 이야기가
그녀에게 무겁게 느껴질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자꾸 마음을 안으로만 감추다 보면
나 자신이 더 희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전송’을 눌렀다.



사흘 뒤, 답장이 도착했다.
“Re: 요즘 마음이 이상해서…”

짧은 제목 뒤로
익숙한 말투의 안부가 이어졌다.

“나도 그래.
아이들이 크면서
나는 점점 옆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야.
어쩐지 나만 그런 것 같았는데,
이 말 듣고 좀 안심했어.
우리 나이쯤 되면
다들 이런 순간을 겪는지도 몰라.”

그 문장을 읽으면서

어딘가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을 안고 있구나.



지금도 가끔
거울 속 내 얼굴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별히 나쁜 날이 아니어도
문득,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억지로 덮지 않는다.
글로 꺼내고,
누군가에게 조용히 건네기도 한다.

글을 쓰는 이 시간만큼은
조금 더 내 마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완전히 달라진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날 보냈던
조용한 용기가 말해줬다.

“괜찮아, 아직 여기 있잖아.”

그 조용한 문장이
오늘을 견디게 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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