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만 되면 좋을 것 같죠?

공무원으로 일하는 법(1)

by LaLa

나는 홍보대행사에서 공기업 SNS 홍보일을 맡아서 하면서, 서포터즈나 기자 활동도 같이 겸했다. 겸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해서 회사 대표님께도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일을 하나하나 보고 싶기도 했다고 말하고 '발대식'을 다녀오기도 했다.


출퇴근하는 일에 출장이 거의 없는 일을 하다 보니 주말에만 움직일 수 있어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나 내가 가까이 이동할 수 있는 곳의 서포터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내가 담당하던 공공기관의 주무관(당시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다른 곳에서 일하던)이 나에게 권유를 했다


"에디터님, 이번에 전문직을 뽑는 공고가 난다던데 지원해 보는 게 어때요?"


나는 순간 두근거렸다. 얼른 홈페이지에서 채용공고를 둘러봤다. 자격은 관련 일을 3년 ~5년 이상 한 경력이 필요했다. 나는 당시 입사한 곳에서 근속연수 5년을 채워가고 있었다. 관공서의 특징은 서류도 직접 제출하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우편발송도 많아졌다)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러 가는 길. 하루 월차를 내어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에디터님은 꼭 붙으실 거예요"


응원해주던 주무관의 말에 한껏 기대했던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과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1시간 30분을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면접을 보고 내려 허허벌판을 바라보던 나의 기분과도 같았다. 멀리 꼬박 면접을 위해 쏟아부었던 에너지가 다 증발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회사를 다녀야겠다. 라며 3개월이 지날 무렵, 내가 서포터즈로 활동하던 곳의 정보를 찾기 위해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비슷한 채용공고가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아서 재공고가 난 시점이었다.


다른 곳은 낙방하였지만, 나는 밑져야 본전으로 다시 지원을 했다.

결과는 '임용'되었다.

임용장을 받았을 때는 기분이 남달랐다. 소리 없이 부모님과 시부모님까지 좋아하셨다.


나는 복도 끝 기자실이 딸린 홍보실로 출근을 했다. 홍보대행사와는 다르게 인하우스의 홍보팀의 업무를 전반적으로 듣고 배울 수 있었다.


홍보대행사의 경우 사업별로 일을 입찰해오기 때문에 사업안에 쓰인 대로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전반적인 홍보일을 배우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다. 나는 전반적인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외주를 주지 않는 인하우스로 들어가게 되면서 나는 기자관리에서부터 사보(신문) 제작과 기자발표회 준비, 홍보의 다양한 부분을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외주를 받던 입장에서 주는 입장으로 '갑'의 입장이 되었다고 철없이 신나 했다.


공직 생활의 최대 단점인 서류 작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직생활은 가보지 않았던 군대생활과 비슷했다.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시 막내 생활을 오랜만에 시작했다. 대행사에서 일할 때에는 심지어 옆 팀의 팀장은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래도 대행사에서는 평등주의를 지향했다. 나는 서른 중반에 막내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기자실의 할아버지 기자분들의 인사, 귀찮은 일 처리부터 시작해서 온갖 잡일을 맡아야 했다. 커피머신의 커피 찌꺼기를 버리는 일에서부터 냉장고 얼음을 채우는 일, 로그인 비번을 까먹은 할아버지 기자분들의 비번을 대신 찾아드리는 일 등 전문적이지 않은 잡일들은 내 일이 되었다.


거기에 서류 작업은 끝이 없었다. 형식이 맞지 않으면 반려되기 일수였다. 참조에 타 부서분이 껴있을 때는 반려를 2번 이상 받으면, 전화가 와서 혼이 났다. 문서는 전에 했던 것을 불러와 재작성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계획을 기안하고, 승인되면 계획 실행 안을 기안하고, 다시 회계처리를 영수증과 함께 기안하고 한 가지의 이벤트를 하려면 최소 3번의 기안문서 작성이 필요했다. 아직도 영수증 첨부는 직접 회계과에 갖다 내고, 다시 승인 후 결제를 처리해서 예산을 처리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결제권자들이 SNS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결제를 올려놓고 한 분 한 분 찾아가서 뭘 하는 건지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는 중에 당직이 찾아왔다. 2달에 한 번꼴로 밤을 새는 당직을 했다.

운이 안 좋을 때는 1달에 1번꼴로 당직을 섰다.


'비가 와서 집에 하수구 냄새가 난다'는 민원부터 '마트 길안내를 해달라는 택시 아저씨' 민원, '구급차가 시끄러우니 사이렌 소리를 내지 말라'는 민원까지 갖가지 민원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욕을 하거나 모욕을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홍수나 산사태 폭설이 오는 비상대기조는 따로 있었다.

당직과 상관없이 폭우가 내리는 날 비상대기조가 되어 지정장소에서 대기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직 첫차가 다니기 전이었다. 버스가 물이 차 운행조차 못했지만, 차가 없었던 나는 물살을 헤치고 비상대기를 하러 가야만 했다.


나는 나 스스로 '봉사정신' 이 있다고 생각했다. 봉사활동도 많이 다녔고, 후원도 한다.

하지만, 공직생활은 그야말로 '대민봉사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누가 공무원들이 칼퇴를 한다고 했던가.

칼퇴를 할 수 있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밤 11시 12시에도 퇴근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이 멀지 않았다는 것에 위로를 삼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월급은 대행사에 다닐 때보다 적었다. 많지 않은 가족수당과 야근수당을 더해도 그전에 칼퇴를 하던 대행사에 다닐 때만큼 보다도 적었다.


나의 열정에 불타오르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공직생활에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다.


"주사님 뭐가 더 필요할까요? 뭘 더 하고 싶으세요?"


라는 말에 나는 SNS를 활성화시킬 '공모전'도 제안하고, 열심히 공모전 제안서도 쓰고, 공모전 사이트 광고도 제안했다. 더 나아가 서포터즈들에게는 1:1로 소통을 하고, 블로그 대문을 바꾸는 방법, 페북과 인스타그램을 활성화시키는 노하우 들을 모조리 방출하고 나를 갈아넣기 시작했다.


나를 갈아 넣으면 열심히 야근으로 일을 하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좋아요와 팔로우가 쭉쭉 늘기 시작했다.


"재미있어졌다" "달라졌다"는 댓글에서부터 "잘했다"는 시의원의 칭찬을 시의회에서 전해오기도 했다. 시의회에서 보통 시의원들은 공무원을 보여주기 식으로 까기 바쁜데, 칭찬을 했다며 밥 먹는 식당에서 팀원들 앞에서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나는 더욱 불타올랐다. 공직사회에서 칭찬이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나의 유노윤호 같은 이 열정이 나에게 화살이 되어서 찌를 줄도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 열심히 성냥처럼 활활 불타오르며 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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