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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Apr 22. 2022

한라산에서 조난 전화를 걸다 (2)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이유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lalachu/134


한라산을 오르며 내려다 본 풍경

4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세상에서 내가 일어나 본 적이 없는 시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잠들었던 시간은 있었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5시 20분쯤이면 성판악 주차장이 만석이 된다는 말에 부리나케 남편을 4시 30분부터 깨워서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같은 호텔에서 벌써 먼저 출발하는 차를 창문으로 내다보고 조바심이 들었다. 주차장이 아니면 차를 댈 수 없게 되었다는 조바심이었다. 그마저도 겨울철이라 6시 30분이 입산 시작이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었다.




"일어나!!!"


나는 부리나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일어나는 것부터 고난이었던 나는 전날 등산옷을 다 입어보고 세팅해놓고 일어나 세수만 하고 바로 튀어갈 준비를 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나 어떤 일을 할 때 엄청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카페에서의 질문을 하거나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수십 번 검색한다.


이번 나의 한라산 등반이 그러했다. 특히나 무릎인대 수술을 한 전적이 있는 내가 과연, 한라산을 오를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계산 조차도 올라가는 시간보다 내려오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어떤 운동선수는 청계산 매봉을 뛰어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까지 40분밖에 안 걸린다고도 했다. 다리를 다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려운 일을 다친 사람은 더더욱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참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했던가. 그중에서도 간혹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응원의 말을 응원삼아 도전을 시작하였다.

정상에서 먹었던 잊을 수 없는 라면

한라산을 등반하기에 제일 가까운 호텔은 어디인가.

혹은 등반 후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등반할 때 가져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한 달 전부터 등반을 위한 쇼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이렇게 해야 하나 할 정도로 한라산 등반 옷차림에 대해서도 조언을 많이 얻었다. 바지를 주문했다가 환불하기를 2번. 양말도 새로 주문하고, 중간에 앉을 때 엉덩이가 시리으니 방석도 사야 하고, 넥 워머도 사야 하고. 사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보기 좋게 나는 체력이 달렸고, 눈 위에 주저앉았다. 뒤이어 산을 오르던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아가씨 이상태로 올라가면 땀이 다 얼어서 저체온증 와요. 헤어밴드 없어요? 내 거 하나 더 있어 줄게 그거 하고 가요"


나는 산신령 같던 분의 도움으로 넥워머를 대신 헤어밴드처럼 하고 다시 산을 오를 수 있었다. 헤어밴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산을 타본 경험에서 나오는 진짜 조언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완등.
이때만 해도 다리가 부러지기 전. 등산중

시간의 단축이 아니라 안전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직 눈이 올 시기가 아니므로 스틱을 하나만 가져갔던 게 잘못이었다. 한라산 정상 부근에는 히말라야가 펼쳐졌다.


들고 올라갔던 보온병의 물은 보기 좋게 식어있었고, 라면은 익지 않았다. 군 비상식량을 들고 온 선구자들을 보며 역시나 세상은 넓고 비법은 많다. 모르는 자만 있을 뿐.


익지 않는 라면은 조금 깨 어물다가, 남편에게 넘기고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때는 조금 신이 났던 것 같다. 오를 때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것들이, 내려올 때는 신이 났다.


하지만, 약속은 깨지고, 목표도 깨진다

사고는 방심할 때 온다


남편이 돌 틈에 살짝 녹은 눈에 미끌리면서 아이젠이 돌에 걸리면서 다리를 깔고 앉으면서 넘어졌다.


한라산에서 뼈가 부러졌다.


두두둑


뭔가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사람의 뼈라는 생각을 처음에 하지 못했다. 나는 전방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단순히 나도 남편도 그냥 다리를 좀 삐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일어서지를 못했다.


나는 다급하게 구조 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까 그 많던 구조 전화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초록색 검색창을 켜서 이미지를 검색하여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네 제 남편이 다리를 다쳤는데요."


"본인 아니고 남편분이세요?"


"네."


"못 움직이시는 거세요? 어디쯤이신데요"


"네. 못 걸어요. 어 여기 몇 미터 표지판이 안 보여서 진달래 대피소 내려가는 길이에요"


"진달래 대피소 보이세요?"


"네"


"그럼 거기 가면 직원 있으니까 직원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구조 전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간과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그것도 산에서 1킬로 이상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를.

걸어서 30분이면 내려왔을 길을 낑낑대면서 2시간 거의 3시간에 걸쳐서 대피소로 내려오면서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먼저 뛰어내려와 직원을 찾았다.


"제 남편이 다리를 다쳐서 내려오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어디 계신데요?"


"지금 내려오는데 다리를 딛지를 못해요"


"그럼 일단 본인은 내려가 계세요."


그리고서는 하산 시간이 늦는다면서 사람들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남편에게 다시 달려가서 나는 남편을 부축하지도 못하고(키 차이와 체급 차 이때 문에) 눈이 쌓인 한라산을 기다시피 남편은 내려오고 있었다.


애가 타는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직원을 붙잡고 얘기했지만, 나에게 돌아온 말은


"본인은 내려가시라니깐요. 환자는 나중에 저희가 찾아서 데려갈 테니까. 내려가세요. "


이때까지만 해도 환자등록이라던지, 상태라던지 이런 것을 묻는 사람도 없었고, 걷지 못한다고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구조한다는 건지.


구조 전화는 구조해주는 거 아니었어?


기어 오다시피 3시간을 내려온 남편이 울먹거리는 나에게 그냥 내려가라고 하면서 부축하려는 남편이 먼저 내려왔음에도 다른 나이가 있는 중년부부에게 환자 등록을 하라고, 안내를 하고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년부부는 우리 부모님보다 젊어 보였지만, 아무 데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러자, 우리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 C!! 얼마나 사람이 다쳐야 구조를 해주는 건데! 뭐 의식불명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뭐야!!"


그제야 사람들을 내려보내기에만 급급했던 직원이 와서 아까 전화했던 구조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환자 등록을 하셔야 환자 이송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안내해주었다.


나는 남편을 대신해서 "너무 아파서 그런 거예요. 죄송해요" 사과를 했고, 남편도 너무 아파서 그랬다면서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제야 내 말을 귓등으로 듣던 남자 직원이 남편을 부축하러 왔고, 남편의 발을 보고서야, 구급차를 호출해야겠다고 했다.


사고가 난 지 3시간이 훌쩍 지난 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환자 등록을 하기 위해 구조 전화를 다시 걸었다.  그런데 돌아온 제주시 담당 공무원의 말은 어이가없었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왜 갑자기 사람들이 연달아 환자 등록을 하지?"


무슨 일은 본인이 만들고 계시잖아요. 민원을 넣어야 하나? 화가 끝까지 났다.

아, 사람들이 왜 시청에 전화를 해서 화가 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공무원으로 일해봐서 어떻게 일처리가 되는지 알지만, 이 안일한 태도의 사고처리가 참 못마땅했다.


그 후 주소와 주거지 신원확인후 환자등록이 되었다. 그 과정도 실랑이가 있었다. 마치 내려가기 귀찮아서 꾀병취급을 하는것이었다. 현장에 직원이 남편 다리가 부은걸 보고서야 내말을 믿어주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는 그저, 외지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철통을 타고 외 레일을 타고 2시간이 넘게 내려왔다. 남편은 너무 힘들었는지 잠이 들었다. 내려오자 그제야 구급차를 불러준다고 해서 우리는 그냥 차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차를 주차하고 등산을 간지라 다시 오기가 더 힘들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차에 타니 오후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등산을 위해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 지 만 12시간째를 넘기고 있었다.

철로로 내려오는 모습(구조중). 아무도 없음. 체온이 떨어질까봐 담요를 덮고 있는데도 빠른속도로 체온이 떨어졌다.

그렇게 부랴부랴 제일 가까운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가는 동안 전화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7시까지 영업시간이었지만, 접수는 6시까지라면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의사가 엑스레이 영상 촬영 담당 직원이 퇴근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6시 20분이었다.


나는 영상 촬영실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한눈에 봐도 육지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퇴근을 위해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퇴근시간 전이지만 환자를 가려 받겠다는 의지였다.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하는 객지인의 서러움이 가슴에서 터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료하지 않고 쉬다가 퇴근하겠다는 의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남편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차를 돌려서 응급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1시간을 넘게 기다려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었다.


제주도 병원의 응급실에 오게 될 줄은. 차라리 처음부터 응급실로 왔으면 조금 덜 기다렸을까.


오후 8시 30분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젊은 의사가 2번이나 왔다.

서울로 올라와서 받은 초기 진료 엑스레이 사진

뼈가 부러져서 수술을 당장 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뼈가 쪼개질 뻔했다고 했다. 뼈가 쫙하고 쪼개지면 파편부터 해서 살 밖으로 뼈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고, 큰 수술이 이어질뻔했다고 했다. 심각하게는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무서운 말을 의사는 내뱉었다.


나와 남편은 망연자실했다.


나이가 있으시면 병원에 입원해서 뼈가 붙을 때까지 있으라고 하겠지만, 젊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을 하면, 3박 4일, 길게는 일주일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경과를 보기 위해) 그리고 오늘 당장 수술도 어렵다고 했다. 담당의가 퇴근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도민이 아닌 관광을 온 사람들이었다.

제주사람들에게 우리는 그저 외지인일 뿐이었다.  

그 이질감이 사고가 나고, 다치고 나니 크게 느껴졌다.


거기에 외지인에 여자라고 엄살을 부리고 꾀병을 부린다는 식의 반응은 정말 화가많이났다. 부러진 뼈사진을 들고가서 당신들이 지금 남의집 남편한테 무슨짓을 한건지 보라고 따지고 싶었기까지했다.


https://brunch.co.kr/@lalachu/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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