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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Apr 27. 2022

한라산에서 조난 전화를 걸다 (3)

닥쳐봐야 알고, 다쳐봐야 안다. 


제주대 응급실에서 수술을 고민하다 
병원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못 찍고, 휠체어를 빌린 호텔에 왔을 때 찍은 모습, 짐을 챙기러 옴

남편은 진통제를 맞고 퉁퉁 부운 다리를 한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키가 큰 남편의 발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는 나머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남편의 옷과 가방 신발들을 챙겼다. 한라산에서 조난 전화를 걸었다가 퇴짜를 당하고, 다리가 부러졌는데 산을 기다시피 절뚝이면서 내려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분노했다. 그렇게 내려오지 않았다면 뼈가 조금이라도 덜 부러졌을 텐데.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내려오다가 또 미끄러진다면, 부러진 뼈가 튀어나오는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분노를 뒤로 하고, 우리는 어디서 수술할지, 어떻게 다리를 조치할지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 남편은 환자이기 때문에, 보호자인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서울 가자마자 수술하세요.
 뼈가 붙기 시작하고 유착이 되기 시작하면 더 위험해요 



우리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의사는 너무 방치하면 뼈가 잘못 붙을 수 있기 때문에 빠른 수술을 권했다. 서울에 가자마자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소견서와 진단서 영상 CD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정산을 하고서 병원을 떠날 수 있었다. 


휴가를 냈던 남편은 회사에 상황을 알리고, 급하게 응급실에서 말 그대로 응급 처치를 받고, 미숙한 나의 운전 솜씨로 차를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당장 급한 것은 목발이었다. 


호텔에 휠체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짐을 옮기는 케리어에 남편을 태워서 이동했다. 남편과 짐을 호텔로 옮기 고나서야 호텔에서 휠체어를 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휠체어를 빌려서 이제 공항으로 가야 한다. 


공항에서도 휠체어를 빌릴 수 있다. 남편의 다리가 붓고 있기 때문에 맨 앞자리에 타야만 한다. 그리고 휠체어로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이 모든 사실을 나는 항공사에 미리 전달했다. 직원들은 나의 티켓에 특이 사항을 전달해주었다. (표시해준 덕분에 비행사 직원들이 3명이 붙었다. 휠체어도 빌릴 수 있었다. 제일 늦게 타고 제일 일찍 내릴 수 있었다. )


그러는 와중에 목발을 사기 위해 나 홀로 제주대 병원 지하를 찾았는데, (첫날은 밤이라 문을 닫음) 키가 180이 넘고 몸집이 크다고 하자 맞는 목발이 없다면서 팔지 않겠다고 했다. 


답답할 일이었다. 우리는 서울로 빨리 가야 수술을 할 병원을 찾는데, 휠체어는 호텔에서는 호텔 내에서만 가능하고, 공항 휠체어는 공항 내에서만 가능했다. 항공기에 가려면 항공편 휠체어를 다시 빌려야 했다. 구간별로 휠체어를 빌리지 않으면, 유료로 비싼 휠체어를 빌려야 했다. 

무엇인든지 닥쳐봐야 안다


나도 전방 십자인대가 끊어져서 휠체어를 타보니, 맨날 하던 보도블록 공사 쓸데없는 줄 알았는데, 보도블록이 울퉁 불퉁해서 울림이 다리로 전해져 너무 아팠다. 횡단보도 시간이 짧다는 것을 다쳐봐야 알았다. 


남편이 다치고서야, 휠체어를 빌리기가 구간별로 빌려야 함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알았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2번의 탑승을 통해 짐을 실었던 비행기에서 다시 내려서 짐을 찾고, 3번의 티켓팅을 통해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휠체어가 탈 수 있는 항공기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타야 하는 구조였다. 다리를 다치지 않아 다면 그냥 조금 귀찮을 일이 굉장히 버거운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목발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딱 한 군데 제주시내에서 구할 수 있는 쇠 목발이 있었다. 10만 원의 목발을 사서 그렇게 직원들의 도움으로 남편은 휠체어를 타고, 그렇게 제주를 도망치듯 떠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 주말이어서 자리가 없어서 비행기를 계속 못 탔다. 심지어 남편은 다리가 굽혀지지 않아서 앞이 틔여 있는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결국 직원에게 


"저는 뒷자리 앉아도 상관없으니 남편 자리 1개만 나도 앞자리로 해주세요. 다리를 못 굽혀요" 


남편은 결국 혼자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뒷자리에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자리에 배정되었다. 


제주시 공무원에게서 받은 상처와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항공사 직원의 배려와 고생으로 우리는 무사히 서울로 올 수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기압 차이가 혹시 다리에 아플까 봐 남편이 걱정되었다. 남편은 분노와 슬픔 복잡한 감정으로 비행기 밖 창문으로 멀어지는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탑승하기 위해 이동 중 


어려 보이고, 여자라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의 구조가 진정성이 없어 보였던 걸까? 꾀병처럼 보였나?


사람들이 원망되었지만, 그런 덕분에 남편이 뼈가 더 부러지는 위험에 처할뻔했다고 생각이 들자 죄책감이 몰려들어왔다. 돌고 돌아 결국은 나 자신을 탓하게 되었다. 체인을 감아도 눈에 미끄러질 수 있음을 예상하지 못한 자신처럼 원망스러운 존재는 없었다. 


그도 나도 이렇게 제주를 떠나는 일이 처음이었다. 

물론, 한라산에서 다리가 부러진 것도 처음,

한라산에서 구조요청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구조요청전화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겪아봐야 알고 

상황은 닥쳐봐야 알고 

상처는 다쳐봐야 안다더니.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씁쓸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더 조심을 했더라면 남편은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조금만 더 전문적이고 빠른 구조가 일어났다면 다리를 덜 다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늘 운명도 그러하듯, 

사고는 일어나려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다쳐봐야 알고, 닥쳐봐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  

사고가 닥치기도 전에 인간은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미리 예단할 수 없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제주의 한라산을 뒤로 하고.



<지난 편 보기>


https://brunch.co.kr/@lalachu/134


https://brunch.co.kr/@lalachu/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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