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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Jun 27. 2022

시험관을 하면서 넘어야하는 것

난임 일기(13)- 불확실성에 대한 확신

1차의 진행이 공난포로 종료되면서 전원을 위해 다른 병원을 2군데 더 상담한 후 다시 원래 병원으로 돌아와 결국 손바꿈 (주치의 변경) 후 2차와 3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매일같이 기다리던 줄도 짧아서 인지 자세하게 상담을 해주는 남자 선생님이 더 잘 맞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2시간 이상 기다렸는데, 선생님이 보자마자 "많이 기다렸지" 라면서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별말은 아니었지만 참 위로가 되었다.


사람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니 별것이 다 섭섭하고 별것이 다 고마워진다. 나는 1차 '공난포'의 산을 넘기 위해 '손바꿈'과 2차례 더 채취를 진행하였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올해 반을 지나오는 동안 3차례의 채취가 진행되었다. 

거의 매달 쉬는 시간 없이 달려온 것이다. 누군가는 1번 채취 후에 3달을 쉬라고 한다던데, 그렇게 보통 1년에 3번 이상의 시험관을 진행하면 몸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하는 편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공격적인 전략의 내 성격과 의사 선생님의 성격이 잘 맞아서 반년 동안 3번의 채취가 진행되었다. 


처음은 아니어도 여전히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기분은 유쾌하지가 않다. 먼저 두통으로 시작되는 고통과 점점 마취가 깨면서 배가 아파오는 기분, 그리고 질에서 피가 묻은 붕대를 빼내는 기분은 3번째 채취를 마치고 나온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부분마취만을 하고서 채취를 진행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는 무조건 수면마취였다. 움직여서 위험해질 경우의 리스크를 줄이는 용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울렁거리는 것까지 추가되어서 마취 후유증이 지속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다 퇴원을 하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상태를 지켜보게 되었다. 2차 때는 너무 극심한 고통으로 전신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파해서 진통제 주사까지 맞았다. 


나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기다려준 남편의 차에 올라 말했다. 

"더는 못하겠다."


시험관도 3차 이상부터는 고차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3차의 고비, 그리고 7차의 고비 이렇게 두 고개가 있는데, 차수가 넘어갈수록 몸도 마음도 더 지쳐가는 것 때문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먼저번의 '공난포'의 재발률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또다시 '고프로락틴'이라는 벽에 부딪치자 절망하고 말았다. 


나의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언제나 제자리였다. 남들은 1번 채취해서 여러 번도 이식한다는데 나는 벌써 채취만 3번 했다. 


2년 동안 다낭 성인 줄 알고 먹었던 제2형 당뇨약도 끊었다. 바뀐 주치의는 내가 다낭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나는 내가 '난저(난소 기능 저하)' 인가 물었다. 난저라고 하기에는 개수가 더 나오고, 다낭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안 나왔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시험관을 하면서 누구나 벽에 부딪친다. 또 누군가는 1차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다는 확률로 그냥 임신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궁내막증이라던지, 난저라던지 여러가지 벽에 부딪쳐서 고차수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버텨내는 것. 

그것이 제일 최우선시 되면서 중요한 시험관을 하면서 넘어야 할 벽이다. 


고 프로락틴의 벽


채취를 앞두고 마취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채취 전 피검에서 수치를 말해주었다. 


"프로락틴이 100이 넘었어요~ 고프로락틴이라서 내과를 가야 해요" 


" 네? " 


당황하는 사이 마취액은 주입되었고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깨어나고 있을 때 정신이 점점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고프로락틴'이라는 단어에 꽂히고 말았다. 회복실에 누워서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검색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병실 안으로는 핸드폰 반입이 되지 않는다) 


프로락틴은 뇌하수체 전엽의 산호성세포에서 분비되는 유즙분비 자극 호르몬이다.

뇌하수체 전엽에서 발생되어 분비되는 호르몬이 나의 의지와 다르게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프로락틴이 높을 경우 '착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 후에 발생되는 호르몬이기 때문에 임신 전에 발생하면 안 된다. 


호르몬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고 귀찮은 것이라. 발생되기 전에 발생되어도 문제고, 발생되어야 할 시점에 발생되지 않으면 또 문제가 된다. 


나는 내과로 보내졌다. 

사실 나는 1차 때도 프로락틴이 높았던 전적이 있었다. 프로락틴이 63이었을 때 난임 담당의사는 나에게 '커버 락틴'이라고 하는 일명 '젖 말리는 약'으로도 통하는 프로락틴을 낮추는 약을 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약은 나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나는 커버 락틴을 먹은 날 죽다 살아났다. 몸 전신에 통증과 발열로 새벽까지 고통스러워하다가 해열진통제를 먹고 나서야 살아났다. 


하지만 그 당시 담당 주치의에게 말했을 때는 그 약은 그런 효과를 불러오지 않는다며 처음 듣는다고 나에게 "환자분이 좀 특이 체질이시네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내 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는 내 몸뚱이를 탓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추후에 내가 주치의를 바꾸게 된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전적이 있어서 바뀐 나의 주치의는 나에게 '커버 락틴'을 바로 처방하지 않고 내과로 보냈다. 내과에서는 원인을 찾아보자고 했다. 일단 섭취 중이던 약 종류와 즙 그리고 호르몬 주사 모든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만약 프로락틴이 떨어지지 않으면, 뇌하수체에 종양이 생긴 것은 아닌지 MRI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약물치료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서 약물치료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에서 뇌하수체 수술을 한 사람들을 찾았다. 생각보다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나보다 수치가 적은 사람도 수술을 권장받았다고 했다. 그냥 뇌하수체 MRI 찍으면 100만 원에 육박하는 돈이 나오니 의사 소견서를 받아서 큰 종합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불확실성의 확실성 


의사들이나 먼저 시험관을 한 친구가 "좀 쉬어갑시다"라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모른다.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몰라주고, 한시가 급한 이때에 내 난자는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는데!라고 반발을 하였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나는 뇌하수체 수술을 검색했다. 수술방법과 시간을 알려주는 유튜브를 보았다. 코로 뇌를 뚫어서 수술하는 것이었다. 뇌하수체 선종을 모르고 그냥 두면 '실명'까지 하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성 멘트도 보게 되었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ajPYYDwA6Jk

뇌하수체 선종 수술 과정을 설명해주는 EBS 컬렉션 유튜브 

불안해진 나는 엄청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해외 논문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의 바다에서 나는 점점 더 불확실한 정보로 확실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위험한 전개였다. 


나는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제 '임신'은 뒷전이 되었으며 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 프로락틴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면 한 가지는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막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운동도 쉬면서 마음대로 살았다. 운동도 하지 않고 과자와 라면을 먹어대던 나에게 '건강검진'은 그나마 내가 양심에 하는 일이었다. (물론, 회사에서 해주는 거라 1년 중 받아야 해서 쉬는 타이밍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몸은 시험관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1년 사이에 간에도 낭종이, 유방에도 석회하가 진행되고, 난소에도 낭종이, 위에도 용종이 아주 있을 것은 다 있었다. 특히나 갑상선 저하가 오고 있었다. 나는 쉽게 피로해지고 쉽게 지쳤다. 특히나 시험관이라는 것은 호르몬을 때려부었다가 끊었다가 내 몸으로 하는 생체 실험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나도 쉽게 넘어가는 게 없구나. 


남들은 잘만 임신한다던데, 나에게는 임신을 방해하는 프로락틴이 나의 의지와 다르게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가슴 통증이 있었는데, 옷이 닿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팠다. 그리고 그 외 증상은 소화가 잘되지 않거나 살이 붙는다거나 '임신 증상'과 비슷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임신 증상만 있을 뿐 내 자궁은 비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먼저 겪었던 '공난포'의 재발률을 줄이기 위해 나는 '난저'인 분들이 많이 한다는 항산화성 영양제를 몸에 때려부었다. 일명 장어라고 불리는 '아르기닌'부터 '포텐시아, 난자 질을 올리는 'sod'와 포도에 들어있다는 '레스버레트롤' 등등 많은 영양제를 먹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1차 이후로 공난포는 발생하지 않았다. 매일 몸에 때려 넣던 영양제를 다 끊고 나니 나는 불안해졌다. '프로락틴'을 낮춰준다는 비타민 E만 간간히 먹을 뿐 그 마저도 올라갈까 봐 어쩌다 한번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주야장천 남편을 붙잡고 "이제는 더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던 과자와 라면들을 먹고 싶을 때 먹고, '오버부스트'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글루텐'을 소화하지 못하는 몸뚱이 덕에 밀가루가 가득한 음식을 먹고 쓰러져 잤다. 


하루에 한 끼는 '샐러드'를 먹고 나머지 한 끼는 '건강식'으로 먹으면서 아이스크림, 음료수, 과자, 모든 걸 끊고 운동하면서 절제된 삶을 살았던 내게 영양제를 끊고 마음대로 사는 삶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찾아온 '죄책감 프리선언'이었다. 


"그런 게 대수인가 내가 뇌 뚜껑을 열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뇌 밑에 있는 뇌하수체이다)  


그동안에는 어쩌다가 먹은 라면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어쩌다 먹은 과자에도, 아이스크림에도 내가 먹은 이 한번 때문에 임신이 안 되는 건 아닐까 먹고 난 후에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 따위 던져버리고 마음껏 먹고 싶은걸 먹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고, 주말에는 나가 놀고, 죄책감 프리 선언은 훨씬 큰 편안함을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살기 시작한 한 달이 된 때쯤, 

나는 이제 슬슬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다시 건강식과 샐러드를 시작해야겠다고 느낄 무렵, 다시 방문한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이식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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