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일기(11)-'시험관'이라는 편견에 대하여
나는 시험관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은 '난임 병원' 그리고 '시험관'에 대한 부담감과 불편함이 더 크다. 때론 남자들의 입장에서 시험관이나 난임 병원에 간다는 것은 내가 어딘가 하자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느끼고, 더욱더 소위 말하는 '인위적인' 잉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의 경우에도 남편이 인위적인 잉태를 하고 싶지 않다며 '시험관'을 유예했다.
그럴 수 있다.
흔히들 착각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시험관'은 인위적인 '생명창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생명창조'는 '신의 영역이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로 그러하다.
우리가 연애나 결혼을 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
누군가는 주위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달라고 하거나, 모임을 나가거나,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을 한다. 어떠한 액션을 취한다. 만날 수 있는 루트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서 남초 회사에 있거나,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여초 회사에 있거나 서로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소개팅'을 해달라 하거나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타입일 수도 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하거나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어딘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가 갖고 싶은 사람이 '시험관'을 하거나 '난임 병원'에 간다고 하면 부정적인 시선이 들어가거나 본인의 일이 되었을 때 겁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시험관 = 소개팅
사실은 '시험관'이나 '난임 병원'의 역할은 '만남을 소개하는 일'을 한다.
남중 남고처럼, 여중 여고처럼 서로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고민을 신체의 난자와 정자가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몸은 신비하고 혹은 더 복잡하고 난해한 상황에 놓여서 만날 수 없는 정자와 난자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곳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게 바로 '시험관'이다.
우리는 흔히 '소개팅'을 한다고 해서 만난 남과 여가 바로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소개로 누군가를 만날 때 당연히 결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만남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차이이다.
우리는 '시험관'이라는 중개자에 의해서 난자와 정자를 체외에서 만날 수 있게 하는 여러 방법 들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이들을 만나게 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중개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신 또한 시험관이라는 소개팅을 통해 만나기는 했지만, 무조건적으로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임신으로 갈 수도 있지만, 안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른다.
물론, 나도 겪어보기 전에는 '시험관'만 하면 다 임신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수정을 해도 자궁 안에서 '착상'을 하는 것은 의사도, 의료기술로도 할 수 없기에 그저 '신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일하게도 이 신의 영역을 무시하고 의료기술로 인간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집을 구할 때 부동산 중개인이 방을 보여줬다고 바로 방을 계약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그저 한번 방을 보았을 뿐이고, 나는 다른 집도 보고 싶은데 덜컥 계약을 무조건적으로 해야 한다면, 누가 방을 부동산 가서 보여달라고 할까.
사람들 중에는 '자만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임신 쪽에서는 '자임'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떠한 사람들은 만남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 있어서 소개팅이나 만날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이다.
그렇기에 소개팅을 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인위적인 만남을 시도한다고 눈총을 보내지 않는 것처럼, '시험관'을 통해 임신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인위적인 생명 탄생을 시도한다는 눈총을 보내지 않았으면 한다.
나팔관이 막혀있거나 정자가 숨겨져 있거나 어떤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만날 수 없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관'을 통해 난자와 정자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인간이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 이다.
진짜 연애를 하고 싶고, 결혼을 하고 싶은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만추'를 기대할 수 없듯이 아이가 간절한 사람들에게 '자임'은 너무 축복 같은 일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에 '시험관'이라는 중개인을 찾는 것뿐이다.
그렇게 중개인을 찾아서 한 번에 결혼에 성공하기도 하고, 결혼중개업체에 등록을 했다가도 횟수를 다 소진하고 나서야 다른 곳에서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하기도 한다. 그저 만날 수 있는 많은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시험관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런 면에서 이효리의 발언인 "시험관까지 하고 싶지 않아"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고 싶다"라고 말했던 과거의 그녀의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당하고 솔직해서 좋았던 이효리의 이번 발언에는 어쩐지 '시험관'이라는 장벽과 편견에 더 힘을 실어준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거부감이 들고 무겁게 느끼는 '시험관'은 실제로 많은 부분이 힘든 것은 맞다. 만약, 사람을 인위적으로 만나는 것조차, 싫다고 말한다면 그럴 수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이효리도 결혼을 정재형의 소개로 이상순을 만났고,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소개해준다고 당연히 결혼하는 게 아니듯이, 집을 한 곳을 봤다고 바로 집을 계약하는 게 아니듯이, 한 사람이 생명을 잉태하는 것 또한 '시험관'으로 당연히 생명이 탄생되리라 생각하는 편견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매우 아쉬운 이야기이다. (물론, 이효리의 의중은 알 수 없다.)
오늘은 인위적인 것은 하고 싶지 않아, 그냥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래!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다시 한번 전하자면, '시험관'과 '난임 병원'은 그저 난자와 정자를 만나게 소개해주는 곳일 뿐이다. 결혼이 간절하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임신이 간절하다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한다.
우리가 연애가 하고 싶어서 소개팅을 해달라는 사람에게 "너는 왜이렇게 인위적으로 사람을 만날려고 하니? 가만히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다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어쩐지 '시험관'을 한다는 사람에게 아이가 오지 않아 고민인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하면서 애기를 가져야하니? 다 자연스럽게 때가 되면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속 일을 잘 알지 못하기에, 나의 난자와 나의 정자가 여중여고여대 같은 상황과 남중남고공대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난임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시험관'이라는 소개팅을 한다.
모든 역사는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남녀가 만나야 결혼을 하고, 난자와 정자가 만나야 임신을 한다.
특히나 만남 이후 착상을 통한 임신은 '삼신'의 영역이다.
아직도 인간의 몸이란 굉장히 복잡한 존재이고, 나의 세포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특한 일이며, 임신은 기적의 일이다. 그저 삼신이 아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 아이를 많이 보내주고 난임 병원에 가득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내주지 않는 청개구리 심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아이는 '하늘이 내려주는 선물'이다.
의사들조차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이식'을 한 이들에게 "잘하고 오세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의학적인 힘을 통해 만남을 주선한 주선자의 역할은 거기까지 이다. 만남(이식) 이후의 착상을 통한 임신은 나와 배우자 세포들의 몫.
다만 내 몸에서 나온 세포인데, 우리의 마음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플 뿐이다.
"나 소개팅해요."라는 게 낙인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나 시험관해요."라는 게 편견없이 편안한 시선들로 바라봐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아이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