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할머니댁에서 자랐던 경험이 있어서일까. 나빌레라의 '할아버지의 기억 상실'의 슬픔이 크게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10대때는 '겁'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20대때는 '사랑'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30대때는 '나'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40대때는 '돈'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50대때는 '직업'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60대때는 '건강'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70대때는 '사람'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하고 80대때는 '기억'의 상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물론 20대에 80대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하고 40대에 10대의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복합적으로 두가지이상의 상실이 한꺼번에 다가올때도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씩씩하게 예배를 드리며 보내드린 엄마는 집으로돌아와 불꺼진 부엌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휴지곽을 붙잡고 울었다. 그날 이후에도 종종 엄마의 우는 자리는 불꺼진 부엌 바닥이었다.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 였다.
나는 고3때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3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고3인 내가 장례식장에 머물지 않고 학교로 가기를 원해서 인사만 하고 다시 학교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점에서 아빠와 친척오빠가 참 섭섭해했다)
아빠는 "작가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고 엄마는 "고3은 수능 페이스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수능 3개월 전이었다. 아빠의 말도 맞고, 엄마의 말도 맞았다. 엄마는 내가 상실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감정에 잘 젖고 잘 휩쓸린다는 사실은 엄마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간절한 기도에도 나는 다음해에 한번더 수능을 봤다. (재수를 했다)
엄마는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는 날 장롱앞에 앉아서 속옷을 챙겨주다가 울었다. 아빠는 엄마를 안아주며 토닥거렸다. 나는 그 요란법석이 싫어서 "나 군대가? 죽으러 가는것도 아닌데 왜 울어." 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등짝을 맞았다.
우리가 점점 익숙해지던 '상실' 속에 산다고는 하지만
내가 서울에서 경험한 것들은 대부분 사랑의 상실의 고통이 제일 컸다.
상실의 고통을 취미생활과 새로운 모임 그리고 등산같은 효율적인 일에 사용했다. 하지만 나도 상실의 고통속에 휘말려 정신을 못차린 적도 있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굳이 본가로 내려가서 고향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과 새로 사귄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빗자루로 엄마에게 맞았다. 엄마는 기운이 넘쳤다. 장롱앞에서 울던 엄마가 아니였다.
그리고 술냄새를 풍기면서 안취한척 하는 나의 모습을 동생은 말그대로 '극혐' 했다. 그리고 언니를 그렇게 만든 그 남자를 더 '극혐' 했다. (하지만 추후 그 극혐하는 남자는 형부가 되었고 동생은 언니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에게 있어서 '상실'의 가장 힘든점은
곁에 없다는 것과 만날 수 없다는 것보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너무 가슴이 아플때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러자 선배가 말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무덤을 한두개씩은 갖고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쌩뚱맞은 말이 나는 너무 무신경한 대답으로 느껴졌다.
무신경한 대답을 하던 선배는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내고, 결혼을 하고 또 나의 결혼식에서 축시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