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 작업실기

- 작업실을 버렸다.

by 한정선


작업실에서 커다란 이젤을 마주 보며 인생의 한 철을 보냈다.

앞, 뒤 재지 않고, 곁눈질 한번 없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보낸 10여 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변화는 보이지 않고, 대신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이 있었으니..

집, 작업실을 가득 채운 판넬, 액자, 작품들과 그 외 무수히 많은 도구들과 pc 안의 사진들.


20200514_183903.jpg 홍제천 변의 집


어느 날 작업실을 뛰쳐나왔다.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요즘 버전으로 '마당을 뛰쳐나온 암탉'처럼,

햇빛, 바람, 눈, 비.. 피부로 와닿는 세상은 아름답고 기쁘고, 때로는 힘들고 슬픈 다양한 레퍼토리의

생생한 라이브 방송이었다.


20190603_145106.jpg 홍제천 변


대부분의 야외활동이 그러하듯 어반 스케치도 '자연과의 싸움'이다.

햇빛, 바람, 더위, 추위 같은 날씨가 변수가 되기도 하고, 그리고 싶은 것이 눈 앞에 있어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선 되어야 할 일은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다.

되도록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곳에 앉지만, 어쩔 수 없이 길거리나 도심 속에 있어야 할 때는 나는 그들에게 투명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 시킨다. 그들 눈에 안 보인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은 거리에서 활동하는 스케쳐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사람들도 많이 익숙 해진 듯하다.



홍제천..

아파트 문만 나서면 갈 수 있는 홍제천은 사계절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멀리 갈 수는 없지만 그림 그리고 싶은 날, 혹은 잠깐 비는 자투리 시간을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넓은 바위 위, 벤치, 파라솔, 수도시설까지, 풀옵션 야외 작업실인 데다, 꽃, 나무, 갈대, 개울, 천변가 집, 건물,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동네의 특성상, 어르신들이 주로 산책을 다니시는데,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시지만, 영락없이 몇 분은 방문(?)하신다.

멀리서 보시고 호기심에 달려오신 할머니,

“어느 복지관에서 배웠어요?”

“안 배웠는데요?”

“기초도 안 배웠어요?”

“네.”

“그런데 그렇게 잘 그려요?”

(다행히 훈훈하게 마무리)

'기초'를 아시는 걸 보니 그림을 배운 경험이 있으신 분이고 할머니 인식 범주에는 복지관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장소일 것이다.

이참에 나도 복지관에서 할머니들과 그림이나 그릴까?

피카소가 제일 그리고 싶었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그림은 할머니들에게도 해당될듯하다.

그나저나 아이들 눈에는 나도 할머니인데, 내 그림은 언제쯤 순수해지려나.



20190705_192924.jpg 스님 마을


집 근처 안산 둘레길에 '봉원사'라는 절이 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태고종의 본산이라, 절 주변으로 한옥, 양옥, 퓨전 주택 등, 스님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있다.

불볕더위가 조금 물러난 느지막한 오후, 산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겸사겸사 집을 나섰다.

시원한 산바람에 인적도 드문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요즘 보기 드문 구멍가게를 발견,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자릿값) 그림을 그린다.

옆 파라솔 동네분들의 구수한 세상 사는 이야기는 덤, 그리는 내내 배경음악이 된다.

골목 담벼락 아래로 자리를 옮기니, 열려있는 창문으로 저녁 짓는 가족들의 정담이 흘러나온다.

도청 아닌 도청, 혼자 있는데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

눈과 귀와 손, 그림은 온몸의 감각을 깨워 기분 좋은 긴장 속에 잠기게 한다


20190705_193046.jpg 스님 마을의 동네 슈퍼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고

식구들 저녁 걱정에 후다닥 보따리를 챙긴다.

오늘 저녁은 또 뭐 해 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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