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 준비로 가을 여행을 떠났다.
-보령 여행
딱히 멋진 풍광을 보러 간 것도,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러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답답한 빌딩 숲을 벗어나고 싶어서 역마살 대마왕 친구와 1박 2일 보령 여행을 떠났다.
최애 작전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기'.
기대치가 낮아서였을까. 늦가을에 날씨 찬스까지 겹친 풍경은 그야말로 '더 이상 뭘 바래'.
눈을 들지 않아도 사방팔방 달려드는 하늘과 세상 여유로운 구름들,
나지막한 들판과 파노라마로 흐르는 능선을 물들이는 가을 색의 그러데이션,
바다와 강이 만나는 옥빛 포구와 조그만 배들, 마치 오래전 여행지에서 사 오곤 했던
엽서 속 풍경 속에 서있는 듯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산, 들, 바다, 하늘, 구름, 나무.. 언제나 별 것도 아닌 것에 위안을 받는다.
잠시 흔들리는 초심(그림을 그리지 않으리라는)을 눈치챈 친구의 '이런 건 그려줘야 해’
하는 명령 같은 요구에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잡았다.
멍석 깔아주고 동네 마실을 자청한 친구 덕분에 오래된 작은 성벽 아래서 가을볕을
쬐며 그림을 그리는 호사를 누렸다.
일주일 단위로 바뀌던 10월의 풍경은 이제 매일매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매일 다니던 집 앞 산책길, 공원길에서 나는 건망증 환자가 된 듯 길을 잃는다.
가을 축제가 사라진 올해, 하늘에 흩어지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은 사라졌지만,
색의 향연을 펼치는 자연의 축제는 계속되고 있다. 항상성이라는 위안으로.
11월은 한 템포 쉬어가는 달이다.
축제 분위기로 넘치는 10월과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달.
삼 남매의 둘째같이 존재감은 떨어지지만 그래서 더 애잔하고 아껴 쓰고 싶은 달이다.
단풍과 낙엽이 섞이고, 가을바람에 겨울 냄새가 묻히고,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짧은 시간,
소풍 전날의 설렘처럼 다가올 겨울 대비에 분주해지는 달이다. 잠시 머물고 간 손님처럼 소리와 느낌으로 남을지라도 그 또한 겨울의 양식이 되는, 11월은 그 자체로 충만한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