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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Oct 24. 2017

산논배미의 가을

시가 있는 마을


산논배미의 가을 / 김선호


 한낮에는 아직도 뜨거운 빛이 거미의 등 위에서 놀고 이랑이 좁아진 논에는 개구리가 죽어있다

말라가는 바닥에서 울지 못하는 우렁들은

눈을 감고 하늘의 해가 얼른 건너가기를 기다리지만

사람 귀한 산촌에는

그래도 그 빛이 따뜻하기에

몇 채의 집들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난다


논두렁 정기를 받아 태어난 큰 아들은

도회지로 떠나 소를 여러 마리 삶아먹고 난 후

회사에서 담배를 피워 연기를 내고

밭두렁 정기를 받은 둘째 아들은

고추밭을 받아간 후

공장에서 야근을 하며 연기를 피운다

우물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딸은

시장에 쪼그려 앉은 고등어를 사들고

탈래탈래 걸어 냉장고로 들어간다

멀리 비탈진 곳에서 남아 있는 사람은

주름 마다 시간을 저장해 놓은 노인 둘


이리 잘리고 저리 잘려서

헝겊을 이어 붙인 계단 모양의 산논배미에

여름의 흔적들이 흔들린다

봄부터 여름까지의 바람이 숨어있는 벼 이삭 마다

구름이 걸려있다

해오라기가 잃어버린 저수지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계절이 거울처럼 고요하다  

가을은 거기서 멈칫거리며

낙엽의 색깔을 천천히 흥정하고 있다

하지만 밤에 찾아오는 서늘함은

그 색깔의 값을 후하게 쳐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산논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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