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늘 위 어딘가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 가볍게 나눈 대화 주제 중에 새옹지마에 관한 게 있었는데, 그것을 비행기에서 직접 겪었다.
내가 처음 배정받은 자리는 앞에 달린 모니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두어 번 승무원에게 이야기를 했으나 첫 번째는 내 자리에서 껐다 켜주었고 두 번째는 원격으로 껐다 켜주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문제는 반복되었고 이내 포기했다. 그러나 이 일이 나쁜 일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일. 아무튼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영화 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은 많으니까. 초반 몇 시간까지는 괜찮았다. 잠도 몇 차례 자고...
그러다 또 한 차례 잠을 자고 깼더니 기내 불이 나 꺼져 있고 창문도 다 닫혀 있었다. 잠도 오지 않고 책도 읽을 수 없었다. 개별 자리 등은 그 작동하지 않는 화면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저 가만히 생각하는(혹은 멍 때리는) 것으로 정녕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인지...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승무원 호출하는 것도 그 화면에서 가능하고, 좀처럼 승무원은 지나가지 않았으며 지나가더라도 잡음 가득한 기내와 어둠 속에서 나의 발버둥은 잘 티 나지 못했다. 혼자 기계를 껐다 켰다를 몇 번 반복해 보고, 문제는 바뀌지 않고. 그러다 지나가던 승무원을 겨우 붙잡았다.
승무원도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결국 마지막 해결책은 자리를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뀐 자리는 웬걸 아주 좋은 자리였다. 비즈니스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코노미에서 추가 금액을 내야 하는 프리미엄 이코노미 정도! 앞뒤 간격이 아주 널찍하여 의자를 뒤로 젖히거나 창가 쪽 사람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할 때 서로 전혀 불편을 끼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좋은 일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법.
아니나 다를까 왼편에는 어린아이 둘을 동반한 4인 가족이 자리했는데, 어린아이들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그 널찍한 자리를 잡은 듯했다. 그런데 그중 어린아이가 아주 큰소리로, 아주 자주 울던 것이었다.
그래도, 영화도 마음껏 볼 수 있고 내 자리만 불을 켜고 마음껏 책도 읽고 음악도 들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다.
13시간의 비행. 정말이지 멀기는 멀구나.
이 긴 시간 동안 세상과의 통신이 불가하다는 사실이 꽤 좋았다. 설령 누군가 아무리 나를 찾아도 찾을 수없는 상태. 소중한 시간. 그래서 비행이라는 건 기꺼이 즐길 만하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6시간 반이 남았다. 이제 겨우 반을 온 것이다.
(1시간 반 후)
8시간 동안 한 것 : 일기 3페이지, 책 1권 읽고 필사, 영화 1편, 밥 1끼, 낮잠
비행기에서 본 영화:
<Das Perfekte Geheimnis>
우리나라 버전으로도 있는 <완벽한 타인>의 독일 버전으로 제목을 직역하면 "완벽한 비밀"이다. 우리나라 버전과 결말이 다르다.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을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꿈'으로 마무리지었는데 독일 버전에서는 '현실'로 마무리지었다. 서로의 치부를 다 알게 되었으나 그것을 용서와 삶의 변화로 이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전개였던 것일까?
나도 잘못을 하고 산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도 나에게 잘못을 하기도 한다. 서로가 그것을 알고서 그 관계는 끝이 나버리기도 하고, 즉 없었던 일이나 혹은 하룻밤 꿈으로 덮기 바쁘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해결하고 더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으나 상대가 관계를 정리해 버린 탓에 없던 일이 된 일이 생각나 씁쓸했다.
<하우스 오브 구찌>
야망으로 접근한 여자의 잘못일까, 자기 부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분리시킨 남자의 잘못일까? 어느 한 편에 치우치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 그러나 좀 어둡고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