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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우울-1

상속받은 우울

by 소소인

A의 우울


A는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코로나가 유행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한 번도 맨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A는 한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고 다녔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그 무엇도 내보일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학급에서 친구와 대화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는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스크와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쯤 감긴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A를 둘러싼 공기는 늘 무거웠고, 조용하면서도 예민했다. A에게는 친구가 없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했다. 혼자서는 버스조차 잘 타지 못했다. 그런 A는,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한번 시작하면 멈출 줄 몰랐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그 우울한 감정의 근원, 지금 느끼고 있는 우울의 깊이, 가족들과의 관계, 홀로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무게. 우울에 우울을 덧붙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그 끝에는 늘 ‘저는 혼자예요’라는 말이 딸려 나온다.


‘저는 혼자예요’


이 말 앞에서, 나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아마 A는, 이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있잖니’


그러나 이 말은 새로운 무책임이 되어 A에게 새로운 상처와 우울을 안겨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담임 선생님이 학생을 ‘혼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하렴. 나도 방법을 찾아보마’

차갑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선이 느껴지도록 의도된 이 말이, 당시 내가 돌려줄 수 있는 최선이면서 최대한의 진실이었다.


상속받은 우울. 그 깊고 캄캄한 샘.


A의 우울은 심한 편이었다. 교실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A의 일면을 지닌 학생들이 늘 있었다. 담임을 맡았던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거의 매년 이런 학생을 만났다. 우울이 가진 깊이와 색깔은 모두 달랐지만, 그 근원은 대부분 같았다. 바로 ‘가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 바깥에서 뭍은 우울을 털어내야 할 바로 그곳이 오히려 어두운 감정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교실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A는 세상 어느 곳에도 마음을 내려놓고 쉬지 못하는, 끝없은 감정의 피로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A는 자신의 삶이 마치 감옥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자신이 몸 담겨있는 가정의 존재에 대해 끝없는 의구심을 토로했다.


A의 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 보았다. 들을수록 안쓰러운 가정사가 이어졌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학대와 이혼, 성장 과정에서 받지 못한 부모님의 사랑. 어려운 가정 형편. 초라한 자존감과 켜켜이 쌓인 외로움. 이 모든 일들이 오랜 시간 A의 삶을 뒤덮어 왔다. A가 가졌던 우울의 이유 들은, 우울에 빠진 또 다른 학생들이 비슷하게 가진 것들이면서 해결책을 도통 알기 어려운 것들이기도 했다.


그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A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기에,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우울을 가진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많은 경우 학생과 비슷하거나 더 깊은 마음의 우울을 지니고 있다. A의 어머니도 그랬다.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어서 가정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돌보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A에 관한 상담인지, 어머니의 상처에 관한 대화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진 후에야 추후의 대책에 관한 몇 가지 결정을 내리고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부부간의 문제, 경제적 이유, 학생의 비행이나 질병 등. 부모님이 상처를 받은 이유는 학생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우울한 학생들의 부모님이 그에 못지않은 우울을 가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우울은 많은 경우 ‘상속받은 우울’이다.


가끔 성적 때문에 우울과 불안을 겪는 아이들과 대화해 보면, 그 원천도 많은 경우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이 우울로 표출되는 것이다. 성적 때문에 눈물 흘리는 학생들의 이야기 끄트머리엔 ‘부모님께 죄송해서’, ‘부모님을 실망시킬까봐’라는 말이 정해진 각본처럼 딸려 나온다.


자크 라캉이 말한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정신 분석학의 명제가 정확히 들어맞는 장면이다. 성적에 대한 욕망이 전적으로 학생들의 내면에서 자라났을까? 아니다. 높은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욕망을 학생들이 욕망하는 것이다. 그것도 죄책감과 함께.


사실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성적에 대한 욕망도 따지고 보면‘타인의 욕망’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높은 성적에 대한 집단적 욕망을 부모님이 욕망하는 것이다. 학교의 균열은 단지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의 파편이 교실 한구석을 찌르고 들어온 결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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