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로 우울을 생산하는 학교
‘배제’로 ‘우울’을 생산하는 학교.
우리나라의 많은 아이들이 중학생 이후부터 취미생활을 비롯한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수행에 임하는 성직자 같은 삶을 시작한다. 수도원 대신 학교와 학원이, 성경과 기도회 대신 교과서와 정기시험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성직자의 수행은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둔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공부는 그 성과가 점수로 증명되지 않으면 그간의 금욕적 삶과 노력이 무의미한 일이 된다. 오히려 시험을 위한 과정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때 더 큰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결과가 좋지 않다면, ‘최선을 다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생들이 느끼는 우울과 불안의 여러 원인 중 하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도, 그렇지 않은 학생도 마음이 편치 않다. 학업에 열성으로 임하는 학생들은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 걱정이다.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은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패배감, 그리고 지금 이 상태로는 미래가 없다는 절망에 빠진다. 학교가 불안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노력의 과정을 칭찬하지 못하는 이 구조에 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는 학교의 구조. 이것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모든 노력의 과정들을 회색 공기로 만들어 교실을 자욱하게 만든다. 교사들은 때때로 학생들이 노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고, 또 그것을 격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가 항상 그 양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 둘 사이의 불일치가 학교에서는 오히려 흔한 일이다. 그만큼 우울도 흔한 감정이 된다.
A는 상담을 청하며 말했다.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에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A는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적은 도저히 교육계열에 진학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발표나 토론수업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해야 할 상황이었다.
‘국어와 영어와 수학이 부족해. 그래서 교사가 될 수 없어’
국어와 영어와 수학 점수가 교사의 자질과 어떤 관계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학교에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국영수 앞에서 무너지는 학생들의 꿈은 우울을 만드는 또 하나의 샘이다. A도 그랬다. 그의 우울은 가정과 더불어 학교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A 앞에서 나는 ‘현실’도, ‘희망’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 긴 시간을 두고 하나씩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곧바로 사범대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공부하는 길도 있어.’
처음 A의 우울을 접했던 날처럼, 나는 현실과 이상, 그 어딘가에 있는 말을 힘겹게 골라 내밀었다. 그게 당시의 내가 짜낼 수 있는 최선의 언어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