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한 장으로 시작된 동거

by 라온재

서로 다른 이유, 같은 결론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왜 우리는 늦은 나이에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걸까?

젊었을 때는 사랑이라 답했지만, 이제는 좀 더 솔직해진다.

여성은 경제적 안정, 남성은 건강과 일상의 돌봄, 그리고 함께 떠나는 여행을 원한다.

표현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운 노년의 현실을 조금 덜 힘들게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경제적 지원을 원하는 그녀들


황혼의 계약 동거를 논할 때,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

난 더 이상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젊어서는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로 자신의 삶을 유보해온 이들이 많다. 이제 와서 또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오히려 남은 인생만큼은 안락하고 평온하게, 최소한 경제적 불안 없이 지내고 싶다는 게 그들의 바람이다.


남성들이 종종 오해하는 지점도 여기 있다.

돈 보고 오는 거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

하지만 냉정히 말해, 여성에게 경제적 안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황혼 재혼 실패 사례 중 많은 부분이 경제적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계약 동거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런 부분을 명확히 하고, 감정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남성의 건강식과 여행 욕구


반면 남성들의 요구는 조금 다르다.

밥 같이 먹고, 여행 다니고, 아프면 같이 병원 가줄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일생 동안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남성들은 은퇴 후 갑자기 생긴 텅 빈 시간 앞에서 당황한다.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허전하다.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어디 아프면 누구 하나 챙겨줄 사람이 없는 것도 서글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성들이 바라는 건 단순한 가사노동이나 간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상을 함께 나누고, 취미를 공유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동반자.

경제적 요구처럼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이 또한 명확한 욕구다.


그래서 계약서를 쓴다


결국 여성과 남성의 요구는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한쪽은 돈, 한쪽은 시간과 정서적 교감.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고, 오해를 줄이며, 감정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장치로 계약서가 등장한다.


계약서라고 해서 거창한 법률 문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소박하고 현실적인 약속의 목록이면 충분하다.

경제적 지원은 각자 독립적으로 책임진다.

식사와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나눈다.

연 2회 이상 함께 여행을 간다.

중대 질병 발생 시 간병 책임은 계약 연장 협의 후 결정한다.

이런 조항들이 오히려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든다.


계약은 감정을 대신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보호하는 울타리다.

서로에게 기대는 방법을 정하고, 실망하지 않을 기대치를 설정하는 것.

그것이 황혼의 계약 동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같이 살되, 각자 사는 법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다.

여성은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고 싶고, 남성은 정서적·일상적 동반자를 원한다.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순간, 계약 동거는 흥정이 아닌 동행이 된다.


우리 같이 살지만, 각자 잘 삽시다.

그 한 문장이야말로 황혼 계약 동거의 본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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