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5월의 완벽한 날이었다

by 러브로라



완벽한 5월의 완벽한 날이었다.

날씨도 공기도 마주치는 사람들까지도

마치 신이 선물해 주신 마지막 날의 만찬처럼 완벽했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고,

서두름이 없는 템포의 보폭으로 집을 나섰다.

교통카드에도 체크카드에도 적당한 돈이 있었고,

마침 가장 저렴한 마을버스를 탔고, 플랫폼에는 마침 가장 빨리 가는 급행 전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분 좋은 느낌은 점차 확신의 환희로 차올랐다.

어떻게 BGM도 조도도 사람들도 뭐하나 빠짐없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그 자리에 오고 가는 대화들이 432hz의 평온하고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그 이야기는 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내 가슴까지 온전하게 전달이 되고

메모하지 않아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상흔처럼 각인된 말이 있다.



‘나는 부유하고 특별하고 자유롭다’



어쩌면 흔하디 흔한 확언 한 마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말이 마치 천사가 보내준 메시지처럼 들렸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부유함 만도 특별함 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궁극에 원하는 것은 역시 자유 함이다.

오직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내가 지지하는 관계 속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순조롭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자유하다.

하지만 이렇게 부유하고 특별하고 자유로웠던 만큼,

현실로 돌아와 느끼는 낙차감은 처절하리 만치 쓸쓸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마치 없던 일인 듯 파편처럼 부서지는 기억의 더미 위에 낮에 본 사람들이 번지듯 사라져 가고,

이제와 텅 빈 타임라인에 주저앉아 모래알처럼 흩어진 흔적을 더듬어 본다.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타임라인 안에서 나는 또 얼마나 헛헛한 말들을 했던가.


마지막으로 본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했더라.

그래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이야기였어.

검은 터널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터널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상상을 했었다는 그녀는

지금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터널 밖으로 나왔지만 한 번씩 트라우마에 잠식된 자신을 느낀다고 했다.

꿋꿋하게 살아내 준 그녀에게 고마웠고, 그녀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내가 트라우마에서 나온 방법을 꼭 알려주고 싶었어.


하지만 무엇 때문에?

왜 나는 트라우마에서 나온 나보다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이토록 애를 쓰고 집착하는 걸까?


그녀의 차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음이 사형수의 발걸음처럼 무거웠다.

꺼져가는 파란불이 내 하찮은 인생 같아서 울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고된 하루의 끝에 설거지 더미처럼 쌓인 슬픔은 언제쯤 끝이 날까.

늙고 가난한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얼마나 빨리 달려야 ‘산다’는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나의 영혼도 나에게 다가오는 영혼도 꽃피우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도

나의 능력은 늘 나의 절망보다 부족하다.

오늘의 절망은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찾아왔을까. 내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늘어갈수록 나는 더 좁고 어두운 방으로 숨고만 싶어 진다.





집에 돌아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직 외투도 벗지 않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호주머니를 뒤져 낮에 만난 친구가 준 연고를 꺼내 본다.


‘나는 부유하고 특별하고 자유롭다’ 사실 이렇게 되리라는 확신도 기대도 없지만, 이렇게라도 약을 발라두면 오늘 밤 잠은 잘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모든 절망과 슬픔이 내 삶의 완벽한 시나리오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잠든다. 어떻게 끝나도 잠이 들면 그날은 끝내 살아낸 하루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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