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질 무렵 우리는 그녀의 집이 있는 세화에 도착해서 만원 치곤 제법 푸짐한 우럭 매운탕 두 그릇에 한라산 소주를 한 병 시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사정 같은 건 묻지 않았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어쩌다 제주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하는 구차한 사연 같은 것 말이다. 대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대해 얘기하거나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사랑했던 루 살로메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학, 철학, 예술사를 공부한 살로메는 저명한 철학가, 문학가, 정신 분석가들의 영원한 뮤즈로 칭송받는 프리 마돈나였고, 프로이트가 두렵다고 표현할 만큼 당대 지식인들을 매혹시킨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에로스적 대상이 아니라 지적 동반자로 생각했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 역시 살로메의 섹슈얼리티만을 원하지 않았다.
살로메와 헤어지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한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영원회귀론을 사랑하라!" 고 말했다. 반복되는 이 삶을, 다시 살아도 좋을 정도로, 멋지게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런 삶이 바로 니체가 추구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원회귀야 말로 살로메가 추구하던 삶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남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가 동경하는 조조와 살로메가 마치 다른 피부를 입은 동일인물처럼 느껴졌다.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해안가의 해변을 찾아 밤공기에 식어가는 모래 위에 앉았다. 멀리 오징어 배가 켠 조명들이 바다 위에 뜬 섬광처럼 빛나고, 모래사장을 적시는 파도가 조조의 남색 에스파듀에 닿을 듯 밀려왔다가 거품처럼 흩어졌다. 조조는 오징어 배가 떠 있는 바다 위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쉽게 착각하는 것이 있어. 누군가가 만만하게 보인다면, 그가 바보인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건데 다들 그걸 너무 쉽게 간과해. 사랑은 의외로 간과하는 것을 통해 소멸되거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내가 만난 누구라도 나를 배려해 주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이기적이었다. 아빠처럼.
조조는 내 이야기가 끝나고 마침표 뒤의 파도소리까지 천천히 어루만지며 읽었다. 그리고 다시 먼바다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랑은 아름다움 이전에 지리하고 집요하고 일방적인 것이야. 타인의 기준을 따라 투박한 면을 고르게 펴고 다듬다 보면 이상적인 밸런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될 수도 있고.”
조조는 갑자기 해변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고는 내게 손을 내밀며 ‘커피 마시고 싶다. 집에 가자’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