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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Aug 28. 2019

그대 자살을 꿈꾸는가? (2)

[space story]  16.

은행에서 7만5천 원을 찾았다. 이제 나의 통장 잔고는 73원이다.


그 돈으로 제일 먼저 한 것은 중국 집에 가서 양장피와 빼갈을 시켜 먹은 것이다. 혼자서 빼갈 두 병과 양장피를 바닥까지 다 쓸어 먹었다. 아무리 본인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솔직히 맨 정신으로 거사를 치르기란 힘들었다.


구기동까지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인도 변에서 손을 흔들었다. 지금 내 등에는 배낭 하나가 매어져 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날이 시퍼런 부엌칼과 밧줄이다.


어머니가 잠시 시장에 간 사이에 몰래 들고 나왔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간 아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잘 있던 부엌칼이 없어진 것이 답답해서 온 집안을 뒤질 것이다.


사실 여자를 저 생으로 보내기 위해서 어떤 도구를 쓸까 많이 고민했다. 권총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일테니 애 저녁에 포기했고, 청산가리 같은 것을 구하기도 귀찮았다. 솔직히 말해서 칼은 쓰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고통 없이 죽여주고 싶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부엌칼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철물점에 가서 튼튼한 밧줄 한 꾸러미도 사 넣었다.


택시 한 대가 섰다.


“아저씨, 구기동이요!”


“등산 가시나 봅니다?”


나는 등산화와 등산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 여자의 집 주소에 山 자가 들어 있어서였지만, 등산복처럼 입은 이유가 있었다. 자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가벼운 산행을 하는 것뿐이라고 내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다.


“근데 요새 구기동에 새로운 등산 코스가 생겼나요? 요즘 들어 부쩍 젊은 사람들이 구기동에 잘 가네요. 오늘 새벽에도 어떤 남자 분을 구기동에 내려드렸답니다. 그 분도 무거운 베낭을 잔뜩 짊어졌던데요?”


“......”


라이벌이 틀림없었다. 누군가 선수쳐서 백 억이 사라져 버릴까봐 마음이 다급해 졌다.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택시를 떠나 보내고, 담배 한 개피를 물었다. 손에서 자꾸 땀이 났다. 아무리 결심을 굳게 했어도 심장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주 천천히 필터 끝까지 다 피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 10시 45분이었다.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여자는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내가 서 있는 언덕 아래로는 한 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빌라가 보인다. 2층 베란다의 창문이 조금 열려져 실크가 틀림없을 하얀 커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주변이 모두 그 집의 소유인지 그 빌라말고 다른 주택은 없었다.


대신 빌라 앞쪽으로 펼쳐져 있는 정원은 솜씨 좋은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그 중간에는 여자가 말했던 것처럼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하지만 정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정원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차고였다. 그 앞에는 나 같은 놈은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할 빨간색 람보르기니 디아블로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차를 한 번 타볼 수만 있다면 10년쯤 수명이 줄어든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닦았다. 그래, 백 억만 내 손에 들어온다면 람보르기니가 문제가 아니다. 남태평양 섬에 가서 더블 침실이 있는 요트를 살수도 있다!


저택을 뒤로 한 채 숲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갔다. 그 길은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작았다. 하지만 양옆으로 자라 있는 나무들 중 어느 하나도, 잔가지가 길 쪽으로 나와 있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이 길로 산책하는 사람을 위해서 깔끔하게 정리를 한 것 같았다.


‘대단한 여자이긴 한 거 같군.’


산책로조차 사람을 사서 다듬을 정도로 유별난 성격의 여자가 왜 그런 광고를 내서 까지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을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폭탄이거나, 아니면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병이 있다면 돈을 주면서 까지 이 짓을 하진 않겠지. 아무튼 불가사의한 일이 틀림없지만,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 여자의 심장에 칼을 꽂으면 된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5분 여를 걸어갔을까.

산책로에 작은 들국화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마치 그 꽃을 따라 오라는 신호 같았다. 한 잎, 한 잎 유혹하듯 떨어져 있는 소국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가끔 몇 개의 들국화가 짓이겨져 있는 걸로 봐서는 벌써 다른 미행자가 그녀를 쫓아 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오솔길에서 빠져 잡목사이에 몸을 숨기고 돌아오는 그녀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형의 말대로라면 그 여자를 죽이러 왔다가 실패한 인간들이 숱한 모양이다. 서두르는 것보다는 조금 시간을 두면서 면밀하게 여자를 관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는 오지 않았다. 벌써 30분은 더 지난 것 같다.


‘왜 안 오지? 벌써 당했나?’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간다. 태양은 중천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여자의 산책이 너무 지연되고 있다고 느낀 순간, 정수리 위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지루하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심장이 가슴에서 튀어 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놀랐다. 하도 긴장하고 있던 터라, 갑작스런 여자 목소리에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피부는... 그 투명한 햇살 아래서 너무 창백해 보였다. 그리고 붉디붉은 입술......


“그 배낭에 들어 있는 거 뭐예요? 칼인가요? 아니면 도끼?”


여자는 사뿐히 나뭇가지에서 뛰어 내렸다.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다. 여전히 놀라 입도 못 다무는 내 앞에 선 그녀의 실루엣은 완벽한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


이런 여자가 죽는다고? 왜?


“정말 답답한 사람이네. 나 죽이러 온 거 맞죠?”


“네? 네.”


여자는 그제야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얼떨결에 엉덩이를 끌며 몸을 뒤로 옮겨 버렸다. 모르는 사

람이 봤다면 죽이러 온 것은 여자고, 내가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만큼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불시에 나타난 여자에 대한 놀라움은 그녀의 다음말로 인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 등신 또 하나 있네. 이 나라에는 나 하나 제대로 죽일 만한 인재가 그렇게 없는 거야?”


여자의 눈빛에 경멸과 무시가 스쳐지나가더니 내 심장에 또 하나의 비수를 꽂았다.


“너 같은 인간한테 이제 질렸어. 그 간덩이를 가지고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야? 괜한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


여자가 돌아섰다. 칠흑 같은 검은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면서, 묘한 향기를 풍겼다. 그것은 약간 비릿한 내음이 배어 있는, 그러니까 명확히 말한다면, 피 냄새였다.


하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저렇게 창백한 얼굴에 약해 빠진 몸을 가진 여자에게 ‘등신’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지금까지 부모님과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당한 무시만으로도 충분히 살맛이 없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까지 그렇게 비쳐진 내 자신이 몸서리쳐지게 싫어졌다. 나는 마치 용수철에 튀긴 듯 벌떡 일어나 여자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기, 기다려요!”


쿵-! 나는 등신이 맞았다. 보통 여기서 튀어 나와야 하는 대사라면,


‘야--! 거시 서!’ 라든가,


‘이봐!’ 라고 강하게 말하고선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원하는 게 죽음인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기다려요.’라니, 그것도 말을 더듬은 채 말이다. 정말 배낭에 있는 칼로 죽어야 하는 것은 저 여자가 아니라 나 인 것 같았다. 정말, 쪽 팔렸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돌아선 여자의 눈빛에는 경멸의 시선은 없었다. 그나마 킬러에 대한 예의를 아는 여자 같았다.


‘킬러에 대한 예의? 윽, 내가 지금 무슨 헛생각을...!’


나는 서둘러 배낭에서 칼을 꺼냈다. 집에서 가져 나올 때는 몰랐는데, 칼날에 작은 쪽파 조각이 하나 묻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어째서 좀 더 폼이 나는 단도를 가져오지 못했을까? 쪽파가 묻어 있는 식칼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른 쪽파 조각을 떨어내려고 했지만, 여자는 이미 그것을 보고 말았다. 빌어먹을, 오늘 진짜 가오 안 선다.


“미, 미안해요. 내가 좀 준비가 미흡하죠?”


“그러게요. 식칼을 들고 온 사람은 오늘 첨 봤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발끝에서부터 덜덜 떨려와 온 몸이 부들부들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칼끝에 붙은 쪽파가 덜렁덜렁 거렸다.


여자는 바로 칼 앞에 멈춰 서서 하얀 손끝으로 쪽파를 집어냈다. 그리고 날 보고 웃는다. 미친 여자가 틀림없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있는 남자 앞에서 웃다니......!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네?”


순간 여자는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자기 쪽으로 강하게 끌어 당겼다. 그 사이에는 그녀의 심장을 겨누고 있던 칼이 있었다. 나는 어찌해볼 사이도 없이 그녀에게 안겼고, 식칼은 그녀의 몸을 쑥, 뚫고 들어갔다. 틀림없이 그녀의 척추가 칼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내 손을 타고 전해져 왔다.


오, 하나님!

눈이 질끈 감겨졌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내 목을 끌어안은 채 힘이 빠지는 그녀의 몸을 받히면서 나는 소리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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