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단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오늘 연재 예정이었던 제목은 ‘심장에도 뇌가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준비를 해 가다가 오늘 제목으로 정한 ‘판단’으로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원래 제목의 내용은 다음에 예정하고 있는 브런치북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판단- judge
판단의 앞에 붙는 수식어로서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붙습니다.
그리고 판단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대상은 ‘자신’ 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에게 마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는 사람은 ‘자신’뿐입니다.
재미있지요?
판단을 하면 자신만 상처를 입는다는 것 말이죠.
오늘의 주제였던 ‘심장에도 뇌가 있다’를 준비하면서, 주제를 그렇게 정한 목적이 실제로는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사용할 여러 가지의 도구 중에서 뇌와 심장이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정해지는 길과 얻어지는 열매가 전혀 달라지는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심장입니다. 자신을 가리킬 때 손가락이 자신의 심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어제 퇴근길에 GTX를 탔습니다. 아직은 탑승자수가 적기 때문에 언제나 편안하게 앉을 수가 있습니다. 탑승한 손님들의 모습은 아주 다양합니다. 반듯하게 앉아서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사람은 비스듬하게 반쯤 누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자분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아마도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큰 소리는 아니지만 쉼 없이 뭔가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말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건장한 청년이 내 오른쪽쯤에 앉더니 큰 목소리로 쉬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는 겁니다. 객실에는 8명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마음이 동요되더군요.
“예의 없는 사람들......”
그런 생각에 잡히는 순간부터 차분히 읽던 책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올리기로 예정했던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읽었던 내용들을 다시 떠올리려고 했지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판단하지 않기’였습니다.
판단하지 않기
-스트레스 솔루션(heartmath solution) 중에서-
이 글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지금의 내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내 앞과 옆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활기찬 모습으로 보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즐거우면 저렇게 쉼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두 사람을 보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경쾌해지면서, 내 생각이 발전하고 있다는 즐거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소득이 큰 사람은 나입니다.
나는 스스로는 겸손하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어떤 상황이든 내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예외 없는 판단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판단할 자격이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 생각은 에스컬레이트를 계속합니다.
그동안 축적된 수 없는 지식이 뇌 속의 수많은 시냅스를 통해서 새로 조직이 되면서 아주 멋진 판단을 자꾸만 쏟아내는 것입니다.
......
그런데, 내 마음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그 결과는 반대로 갑니다.
혈압도 올랐고, 마음도 요동을 치고 있음을 느낍니다.
나의 뇌 속의 편도체가 계속 긴장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서 시상하부는 부신피질에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혈압이 오르는 이유, 마음이 요동치는 이유입니다.
내가 쌓아 온 지식이 이런 계산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죠.
“또 바보 같은 생각에 빠졌구나. 이제 그만 두자”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심장에 집중을 하면, 마음이 점점 차분해져 갑니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더욱 편안해지면서, 오늘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갑니다.
아주 어렸을 때, 예수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영화가 매우 많았고, 학교에서도 상영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들 중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제자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일곱 번을 용서했는데, 얼마나 더 용서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하라”
그 말을 들은 후 베드로가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자가 베드로의 뺨을 때렸습니다.
“너희 선생이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놓으라고 했지?!”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오른뺨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가 이제는 이해됩니다.
그는 분노를 내려놓음으로써, 판단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뒤를 기쁜 마음으로 따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영화였다고 당시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처럼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기로 작정한다면 말이죠
데이비드 호킨스의 ‘놓아버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 청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 선생이 청년에게 자신에게 온 이유를 묻습니다.
머뭇거리던 청년이 말을 합니다. “선생님이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배우러 왔습니다.”
“진작 이야기하지 그랬느냐. 가르쳐 주마.
지금 바로 집에 가서 정한수를 한 그릇 떠 놓고 매일 기도하거라,
그럼 황금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청년은 신이 나서 집으로 와서 목욕재계를 하고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합니다. 매일매일 말이죠.
그런데 자꾸 원숭이 엉덩이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 생각을 떼어 버릴 수 없어서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선생님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부정적인 것이 반복적으로 기억이 되면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노래로 인기를 얻은 가수들의 삶을 보면, 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면서 계속 슬픈 마음을 가슴에 새기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상은 희희낙락하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는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계속 판단이 쌓여갑니다.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스테로이드가 계속 분비되면서
자신의 몸은 계속 멍들어갑니다.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만 갑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건강한 마음, 건강한 몸이 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은
자신이 잊고 있던 자신의 재능을 기억해 내고 자신에게 계속 기억을 시키는 일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보는 마음이 있거든^^"
아무리 작은 기억이라도 그런 적이 꼭 있을 겁니다.
그것을 계속 기억해 내면 너그러운 마음이 점점 커져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