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서 #3/5

고된 생을 살아낸 한 청춘의 마지막 편지

by 마지막 네오

우리가 다시 만난 날도 나는 기억난다. 나보다 키가 훨씬 훌쩍 자란 네 녀석이 중동중학교… 음… 몇 반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학교에서 네가 전체 1등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사실 참 기뻤다. 물론 내 성질대로 네 앞에서는 투덜대며 비꼬아버렸지만 말이다.


국민학교 때 같은 반이 되고, 네가 먼저 내게 친구 하자고 손을 내밀던 그때부터, 다시 만난 그날까지 우리는 그렇게 자주 만났던 것 같지 않은데도 만날 때마다 너는 참 오래된 친구 같았지. 물론 당시에는 어려서, 뭐 그런 것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지영이 기억나니? 지선이도 기억나겠지?

그 계집애들… 우리 사이를 무참하게 박살 내버린 계집애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겨우겨우 졸업한 개 같은 그놈의 중학교를 끝내고 네가 진학한 동성고등학교.

그 학교 교복은 솔직히 이제야 털어놓는데… 참 멋졌다. 특히 네 훤칠한 키에 참 어울리는 교복이었다. 소라색 바지에 길고 마른 다리는 참 이상하게 적절한 조화였다고 생각해. 하지만 모든 면에서 너무나 월등한 네 녀석에게 그런 사소한 것마저 인정할 수 없었던 건 네 앞에서는 도저히 말할 용기가 없었던 열등감에 가득한 바보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식 날 영어 선생 사건 알지? 그거 사실은 내가 한 거야. 그 새끼가 하도 너만 이뻐해서 내가 밀가루 발라준 거야. 그 대머리에 밀가루 떡칠을 해줬을 때 그 표정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 그래, 옛날 어린 시절을 생각하다 보니 두서가 없어졌네. 그래그래, 지영이하고 지선이 얘기를 꺼냈었지.


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도서관에서 만난 지영이.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착하고… 그에 비해서 지선이는 못생겼고, 뚱뚱하고…

문제는 두 사람 다 너를 좋아했었다는 거지. 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나에게 축구를 해보라고 권유했을 때 내가 비웃었잖냐, 그런데 어느날 지영이가 나에게 공 차는 게 멋있다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나는 지랄같이 해대던 싸움질을 잠시 멈추고 미치도록 공을 찼던 거다.


이제야 털어놓는 것이지만, 지영이가 참 좋았다. 그 애가 해 달라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런 지영이가 너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너를 이유 없이 두들겨 팬 그날, 아!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던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건넬 수 없을 만큼 너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무엇인가가 있었다.


맞아. 지영이는 너에게 어울려. 지선이처럼 날라리도 아니고… 천사 같고 조용한 그 아이는 나에게는 너무나 안 어울린다는 것을 결국 매몰차게 네 녀석을 두들겨 패 놓았을 때, 너를 걱정하며 다급히 뛰어가던 지영이의 뒷모습을 보고 난 깨달았지.

내 눈에 지영이와 지선이가 비교되어서 보이는 것처럼 분명 그녀들에게도 너와 나는 천사와 악마처럼 구분되어 보인다는 것을.


난 항상 다정했던 네 녀석의 그 넓은 마음이 정말 싫었지. 어떻게 해서든 네놈 코를 납작하게 해 보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결정적으로 지영이가 눈물을 흘리며 네가 누워있는 병원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본 그날에… 그래,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공평 자체가 사실은 공평한 처사라는 것을 알았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그래, 그래서 어차피 포기한 공부는 그렇다 치고 열심히 해오던 축구도 때려치운 거야. 사람에게 의미를 잃은 행동은 하기 싫은 노동으로 변할 뿐이더라.


네가 내 앞에 있었다면 분명 그랬겠지. ‘이 못난 녀석아, 정신 좀 차려. 제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상에 대해서 용기를 가져’라고… 너만은 나에게 항상 너랑 하나도 다른 곳 없는 평등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내가 느끼는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영이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 때문에 그 애에게 시큰둥했다는 것 알아. 사실은 네 녀석도 무척 지영이를 좋아했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 날라리 같은 지선이 계집애를 가까이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너랑 나랑은 평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와 느낌이 네가 갖는 느낌과 내가 갖는 느낌에서도 차이가 있다. 너는 웃으면서 내게 ‘계집애들이야… 뭐, 다 똑같지. 너답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한 차이를 보면서 커다란 절망을 느꼈어. 바보 같지…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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