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생을 살아낸 한 청춘의 마지막 편지
1년 전쯤 조직에 가담해 있는 녀석을 만나러 이화여대 앞에 갔는데 거기에서 그녀를 봤다.
이름은 ‘송차희’라고 한다. 얼굴도 예뻤지만 내 시선이 딱 굳어버린 이유는 그녀가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의 주인공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너도 알지! 내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그 사진. 아버지가 투신자살로 죽었을 때, 내 손에 유일하게 남겨진 내 부모의 유산이었지.
한 번도 따스함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화사한 미소’. 내가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이 개 같은 세상을 지금껏 살아오게 했던 모든 원동력이었다.
남들에게는 한낱 헐어빠진 종이 한 장이었겠지만, 내게는 인생의 모든 소중함을 다 내어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모든 것이었다.
그분과 너무나 똑같이 생긴, 너무나 똑같은 미소를 가진 그녀를 봤을 때 내 심장은 멈춰버릴 뻔했다.
나는 그녀라면 변할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거짓 대학생이 되어 그녀와 만났고, 그녀도 다행히 나를 아주 좋아하고 사랑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이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헤어 나오려 했던 악의 구렁텅이… 놈들은 하나같이 비열하고 썩어빠진 인간들답게 비열한 방법으로 나를 얽어매려 했다. 숨기려 그렇게 애를 썼지만 어떻게 알아냈는지, 보스는 급기야 그녀에게까지 마수를 뻗었지. 그것은 나를 굴복시키려는 놈의 방식이었어.
순진한 그녀는 내 이름을 대며 꼬셔대는 보스를 무조건 믿고 의심 없이 따라나선 거야. 결국 놈에게 참혹한 변을 당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너라면… 만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유일한, 아니 내게는 정말 사랑 이상의 사람이었다. 난 오직 그녀 하나로 인해서 나의 모든 인생을 새롭게 바꿔 보려고 했어. 그런 그녀를 욕보이고, 그 백합 같은 여자를 무참하게 짓밟은 그 개새끼! 그 개새끼를!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경찰에 신고라도 할 거니? 게다가 자신 스스로가 범법자 신세라면… 이렇게 억울하고 이렇게 참아내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했겠냐고… 너는 나보다 항상 침착하고 현명했잖아! 내게 친구로서 어떠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던 너잖아!
과연 세상은 누구 편에 설까? 나쁜놈? 더 나쁜놈? 아니, 세상이 보기에는 모두 똑같은 쓰레기일 뿐이지. 거기에 사연은 필요없다.
네가 나라고 해도… 아니, 정확히 내 입장이었다 해도 답은 없다. 나는 그래서 놈의 온 육신을 갈가리 찢어 죽였다. 지금쯤 놈의 구역질 나는 고깃덩어리는 하수구 썩은 물을 타고 어딘가에서 스러져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 없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더 이상 외롭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그녀를 알지 못했더라면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그러나 그녀가 머물다간 내 가슴은 이젠 예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내게 있어 정말이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나의 그녀와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그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친구… 네가 이 편지를 거의 다 읽었을 즈음에는 나는 차갑게 식어 이 개 같은 세상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노력하면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좆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나는 한 번도 공정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개 같은 세상을 떠나 이제 나를 기다리는 그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어머니의 사진을 볼 때마다 얼마나 달려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단 한 번만이라도!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따스한 어머니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그런 내 소망을 들으시고 차희를 내게 보내주신 게 틀림없다고 나는 믿었다.
차희는 내가 그리던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느끼게 해 주었고, 또한 나를 정상적인 한 사람의 사내로 만들어 주었다.
이제 나는 그들 곁으로 갈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잃고 거리낌 없이 외로운 세상을 등진 것처럼. 나 또한 어머니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
너에게 이렇게나마 나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너무나 외롭고 비참했던 삶을 살다 간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절망스럽더라. 이미 오래전에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면서 말은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쓴다.
하나의 청춘은 이렇게 진다. 너는 나의 몫까지 부디 행복하고 즐겁게 살길 바란다. 그리고… 끝까지 나의 친구로 남아준 너에게 감사한다.
내가… 너에게 친구로서 똑바로 서지 못했으나, 사회니 문화니 이런 거 다 접어두고 벌거벗은 사람으로 서로 앞에 서서 너만큼 진실하고 좋은 사람은 없었다고 꼭 말하고 싶다.
내가 잘못했던 일은 부디 용서해라. 네가 내게 해주었던 말처럼 큰 마음으로 세상 모든 아름답고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고 사랑하며 살기 바란다.
자, 그럼… 길고 지루했던 나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친구야, 슬퍼하지는 마라… 우리의 세상에서는 떠나지만, 나는 차희와 아버지 그리고 평생을 꿈에서나 그려보던 어머니의 곁으로 이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부디 안녕히…
作 1998.08.01. 00:45.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