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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헥토르 Aug 04. 2018

야근 때 생각 11

시간: 17:30 


5월 초가 왔음에도 아직 두꺼운 점퍼를 사람들이 벗을 줄을 모른다. 나 역시 패딩 없이는 거리를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몸이 차가움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한국은 벌써 한여름이라는 소식과 함께 기온이 25도를 웃돌며, 여름을 준비하는 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폴란드는 몽골과 같은 위도상에 있는 국가라 그런지 좀처럼 봄도 아닌 겨울 속에서 계속 날씨가 맴도는 것 같다. 패딩을 벗고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켠다. 그리고 아웃룩을 오픈하게 된다. 이 메일이 속속 밀려들어온다. 전날 밤까지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흔적들과 시차가 다른 본사에서의 아우성들로 가득 차있다. 마치 옛날에 급한 장계들이 속속 올라와 다급 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듯한다. 진대리는 어제 늦게 까지 고생했던 흔적이 메일 속에 나타나 있다.   

이 메일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면 가끔씩은 채팅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명 핑퐁 메일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단답형의 길들여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상대주의 ' relativism ' 란 한마디로 모든 곳의 ' 참 ' 과 ' 거짓 ' 이 각자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탓으로 이 메일 속에 각기 다른 사람들의 참과 거짓 공방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줄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참과 거짓은 회사생활하다 보면 대부분 참으로 귀결되기 위한 수많은 구조적인 변경과 해석, 절차들을 만들어내어 거짓도 참으로, 참도 거짓으로 만들어 내는 가공적인 생산을 주도해 나간다. 우리는 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 것이므로 우리는 참과 거짓에 대한 서로 간의 상대적인 입장을 통일화시키고 획일화시켜 보다 나은 그리고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오퍼레이션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거짓으로 해방되었을까?  


장실장과 김책임으로부터 자주 듣고 나도 참 공감하는 우스개 농담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우리 현실. 홍길동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참을 참이라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쉽게도 많이 생겨난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을 야기한다. 실제 숫자를 실제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노출이 되고, 그 실제 매출과 상급자의 Target 혹은 원하는 숫자, 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이미 해버리게끔 만들어버린 그 상황에 못 이겨 만들어 보낸 옛날의 과거 숫자와 괴리감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 괴리감으로 인한 엄청난 찰렌지와 숙제들, 그로 인한 야근과 현실성 없는 것을 현실성 있게 만들어야 하는 실행계획을 만드는 일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큰 쓰나미로 이어지는 거대한 재앙과도 같다. 

큰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실제 매출을 말하지 못한다. 지금은 쓰나미 맞을 타이밍이 아니기에. 결국 그 다른 숫자로 보고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고, 그 숫자에 맞춰 다시 다른 Raw data로 만들어 기초 숫자를 만들어야 하기에 또 다른 작업과 불필요한 시간이 소모하게 되고, 야근을 하는데 더욱더 생산성 없는 야근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 몫은 PM과 APM, 그리고 집에 아기들이 있는 다정스러운 가정이 있는 수많은 직원들의 몫이다.  

리포트도 타이밍이자 눈치였다. 숫자를 더 빼느냐, 들 빼느냐, 나중에 빼느냐. 결국 더 깨지느냐, 덜 깨지느냐의 문제다.  

“해보지도 않고, 그 숫자를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 백전백패인 거 뻔히 아는데,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은 어려운 건가?  

곽대리가 말을 꺼낸다.  

“Target 이 너무 많아, 계기판이 너무 많아.” 


사우디에서도 너무 많은 지표로 인해 숫자만 가공하다가 결국 제대로 분석다운 분석을 해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럽이라고 다르겠는가. 같은 회사 안인 것을. BP가 있고, MP가 있고, 과거 ML이 있으며, 작계가 있고, CP가 있다. 계기판만 보다가 결국 우리 방향은 제대로 된 목적지를 가지 못하고 표류하게 될 까 봐 두렵기도 하다. 너무 많은 계기판은 조종에 방해가 된다.  


중복된 보고 현황도 문제. 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인 이 중복 보고. 법인 내부에 숫자를 보내고, 유럽본부에 또 숫자를 보내고, 다시 본사에 같은 숫자 또 보내고, 또다시 매우 높으신 분에게 같은 숫자를 또 보내드린다. 잠잠하다 싶으면 본사의 다른 부서의 팀이 다시 또 비슷한 숫자를 요청한다. 이는 필히 불필요한 보고의 업무량을 가중시킨다. 

그 불필요한 업무 보고의 몫은 역시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PM과 APM, 그리고 수많은 직원들이다. 정녕 시스템은 왜 몇 백만 불씩 투자해서 만들어 놓았는가? 아직도 엑셀이 그분들에게 편한가? 아니면 보고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성의에 대한 표시를 요구하는지. 

그렇다면 월급 역시 성의에 대한 성의 수당 역시 포함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특정 시스템에 한 가지의 숫자를 올리고, 그 숫자를 모두가 함께 공유가 되고, 함께 고민하는 장이 열리는 길이 곧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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