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제 눈에 띄는 특별한 애로사항은 없을 줄 알았는데 불현듯 떠오른 사건이 있다. 내 10년 근무 기간 동안 두 번 발생한 일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된다는 그 일이다.
일찍 출근을 하고, 좌석에 앉아서 다니고, 30분~1시간가량을 가야 하니 모자란 잠을 채우기 딱 좋다.
처음에야 기차 좌석에 앉아 자는 것이 영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앉아서 눈만 감으면 저세상으로 가는 스킬이 발전한다. 적당한 진동과 리듬감 있는 움직임은 더욱더 깊은 수면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신기하게도 귀는 대충 열려있고, 내가 타는 기차가 어느 어느 역에 서고 안 서는지를 대략은 알기 때문에, 또 자유석에 앉게 되면 우리 동료들이 우르르 다 같이 내리기 때문에 도착하면 비몽사몽 간에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가끔 정말 너무 피곤했던 건지 무엇에 홀렸는지 몰라도 내릴 역을 지나치기도 한다!!!!
늘 다니는 곳이라도 지하철 방향 거꾸로 타고 몇 정거장 놓치고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기차는 알다시피 다음 역이 2-3분 거리가 아니고, 가까우면 10분, 멀면 30분은 가야 한다.
정말이지 갑자기 창밖으로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주변이 왜 이리 아무도 없는지, 무슨 일이지, 어디지? 기차는 뭐 안내 전광판도 없으니까, 정말 정신이 번쩍 들고 등골이 서늘하다. 지각은 따놓은 당상이다.
오송 다음은 대전이나 익산, 공주다. 도시가 바뀐다. 아니 도가 바뀐다.
처음 당해보면 너무너무 당황스럽고 슬프고 또 현타 오고 그나저나 이를 어쩌지 알았다고 내릴 수도 없으니 참 난감하다.
승무원을 찾아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포스트잇에 이 자는 원래 이 기차를 타고 여기부터 여기까지만 타야 하는데 지나쳐서 다음 역에서 돌아가는 기차를 타오니 이 사람을 선처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써주셨었다.
오래전 일인데 요즘도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해 주는지 모르겠다. 실수라 하더라도 타야 하는 기차가 아닌 그 앞이나 뒤의 시간의 기차를 타면 표를 교환을 하거나 새로 돈을 내고 사야 한다(기차에서 표를 구매하면 무임승차로 간주되어 50% 추가 운임비가 붙는다).
특별히 갈 일 없는 대전에 갔으니 성심당 빵이라도 사 왔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초년생이었던 나는 너무 당황해서 상사에게 전화를 드리고 지각할 수도 있다고 말씀을 드리고 부랴부랴 승강장을 옮겨 제일 빠른 기차를 타고 돌아갔다.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수두룩하단다.
출근길 늦는 건 어쩌면 다행? 일 수도 있는데, 회식을 하거나 늦은 시간에 기차에서 잠들었는데 그게 만약... 내가 가야 하는 상행선이 아닌 하행선이었다면... 부산까지 갔다는 그런 괴담이 있다. 괴담이 아니라 진짜. 상행선은 최대 행신까지 가기 때문에 서울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행신까지 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보통은 기차가 정해진 플랫폼에서 다니지만 사정에 따라 플랫폼이 바뀌면 갑자기 다른 기차를 탈 수도 있고, 연착 등의 이슈로 잘 못 탈 수도 있어서 기차 출발 시간도 중요하지만 항상 기차 번호를 보고(이게 제일 확실!) 확인을 하고 타야 한다. 하지만 정기권 통근자들은 해당 구간에서는 어떤 기차를 올라타도 되니까 그냥 관성에 따라다니다 보면 이상한 기차를 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생각하면 벌어질 수도 있고, 당연한 일인데 출근길 잠깐 더 졸았다고 이렇게 황당한 결과가 벌어지니 그냥 웃기기도 하고 역시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