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실을 여는 순간 물통이 떨어졌다. '아차'하는 사이 쿵 하고 엄지발가락을 찧었다. 얼마 전 이모가 보내 주신 2리터들이 고로쇠 수액을 좁은 냉동실에 쑤셔 넣었던 게 사달을 냈다.
밤사이 엄지발가락이 시커멓게 멍들었다. 아주 큰 통증은 없어 그냥 넘어가려다 혹시나 싶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엄지발가락 엑스레이를 야구방망이처럼 키워 뼈의 실금을 보여 주었다. 마취 주사를 놓고 뼈를 맞추고 물리치료에 깁스까지 20만 원의 대공사가 벌어졌다. 무심코 냉동실 문을 열어 본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아니다. 이건 냉동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먹지도 않을 걸 쟁여 놓던 습관의 귀결이다. 고로쇠 수액을 넣을 공간이 없을 때 3년된 만두, 5년 전의 관자살, 7년 넘은 다진 마늘 중에서 하나라도 꺼내어 버렸으면 되었을 텐데, 굳이 그 틈에 고로쇠를 끼워 넣다 이렇게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절뚝거리는 처지가 되고서야 화풀이하듯 냉동실을 턴다. 관자살이나 다진마늘은 유통기한이 찍혀 있어 짐작이라도 하건만, 삼겹살 두 조각과 반건조 오징어, 눌러 붙은 아이스크림은 언제 처박아 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곶감은 제사 때마다 남는 애물덩이인데, 가장 안쪽에서 뜯어낸 녀석은 올 설날의 곶감과 대여섯 살 터울이 나 보였다.
생활 공간이 이 지경인데 머릿속이라고 다를까. 아니, 그 역이 맞겠다. 쓸데 없는 고민, 돌이킬 수 없는 후회, 해결 못할 분노 따위가 꽁꽁 엉겨붙어 있다. 가장 심각한 건 온갖 미련들이다. 이제는 놓아 보낼 때도 되었는데, 그래야 나도 앞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못내 그러지 못한 미련들이 곶감처럼 머릿속 여기저기 박혀 있다.
이건 일종의 저장 강박이다. 1호선 서울역 지하보도에는 잡동사니를 화산처럼 쌓아 놓은 노숙자 할머니가 계신다. 분화구 속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심리학에서는 용도가 불분명한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걸 '수집광'이라 한다. 내 머릿속이 수집광인 한 발등은 언제든 찍힐 수 있다.
쓰레기 봉지를 꺼내려 주방 서랍을 열자 나무젓가락, 플라스틱 식기, 비닐장갑 따위가 그득하다. 이것도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날더러 수집광이라 해도 할 말이 없겠네, 절뚝거리며 몽땅 쓰레기통으로 쏟아 넣는다. 그까짓 부상에 과잉진료 아닌가 싶더니만 이제 보니 정신과 명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