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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Jul 23. 2024

어머니가 옥수수 세 자루를 가져오셨어

  -옥수수 남았어?

  -아니. 거의 다 먹었어.

  -그걸 다?

  -응.

  -어제 어머니가 옥수수 세 자루 가져오셨다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벌써 다 먹어?

  -어제 내가 반 개. 아들이 한 개. 오늘 내가 한 개. 그래서 반 개 남았는데?

  -뭐야. 세 자루라고 해서 난 또 누가 농사지은 걸 얻어 오셨나 했지.

  -세 자루가 큰 망에 담긴 옥수수 무더기인 줄 알았구나?

  -응. 누가 그 자루가 그 자룬 줄 알아?

  -왜애? 난 쓰는데?

  -개인어 아니야 개인어?('꽃이 타다'의 쓰임을 동조하지 않고 했던 내 말을 고대로 따라 하는 센스 보소!)

  -쓰지 왜? '지팡이 한 자루' 하듯이 '무 한 자루' 하잖아. '옥수수  자루'도 쓰는데?

  -그렇게 쓰면 나처럼 사람들이 헷갈린다니까.

  -우리 외할머니도 쓰셨어. "옥시시 쪘응께 한 자루 먹어 봐라잉." 하셨다고.

  -그럼 방언 아닙니까? 이제 거의 안 쓰이니 고어거나.

  -쳇. 집에 가면 바로 말뭉치 찾는다, 내가!

  -그전에 내가 먼저 찾지 뭐.(남편이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내 말이 맞네. 사람들이 헷갈려 할 수 있어 이때의 '자루'는 '개'로 통일했다고 돼 있네.

  -통일? 표준어 규정에 있나? 기억에 없는데.


    이야기는 이렇다. 어제 어머니께서 새로 사신 배추김치 한 통, 노각무침 조금, 찐 단호박 반 개, 찐 옥수수 세 개를 가져다 주셨다. 그중에서 옥수수와 단호박은 막 쪄서 먹음직했다. 저녁을 먹어 배가 부른데도 옥수수를 반으로 잘라 앉은자리에서 먹었다. 큰애가 하나를 더 먹었고 오늘 오후에 일하다 출출해서 내가 한 개를 먹 현재 반 개뿐이다. 사물을 세는 단위로 한자어 '개'가 폭넓게 쓰이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주는 어감과 발음이 좋아서 비슷한 문맥라면 그에 맞는 고유어를 쓰는 다. 의식적일 때도 있고 '옥수수 세 자루'처럼 어릴 때부터 써서 입에 붙은 말을 무의식적으로 쓸 때도 있다.


  남편이 이해한 '옥수수 세 자루'는  '속에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헝겊 따위로 길고 크게 만든 주머니.'를 뜻하는 단위 명사이고, 내가 말한 '옥수수 세 자루'는 (옛말 투의)  '길쭉하게 생긴 물건, 도구, 채소.'를 뜻하는 단위 명사였다.  현행 국어사전 '옥수수 세 자루', '무 한 자루' 등의 '자루'는 용례와 뜻풀이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연필, 총, 창, 호미, 도끼, 칼'만을 용례로 보이고 '필기구, 연장, 무기' 등을 세는 단위로만 풀이하고 있었다.

현행 <우리말샘>의 '자루002' 뜻풀이와 용례


현행 <우리말샘>의 '자루005' 뜻풀이와 용례

  뜨헉. 어쩜 '자루002'의 용례도 '세 자루의 옥수수'람. 들린다, 들. 남편의 "거봐!" 소리. 끙. ㅜㅜ


  '무 한 자루', '옥수수  자루'처럼 예전에는 기름하게 생긴 사물에도 두루 쓰이던 '자루'가 무엇을 담는 포대의 '자루'와 형태가 같아 의미 간섭이 일어나면서 그 쓰임이 밀려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낱낱을 뜻하는 '옥수수 세 자루'의 퇴장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밤.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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